불안, 나를 태우는 또 다른 나 (3)
[정신의학신문 : 채정호 가톨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대한불안의학회회장]
우리는 어디에서 불안을 느낄까요?
‘불안’이라는 단어를 현실적으로 살펴보자. 하고 많은 위험요소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조상은 누구일까? 두려움을 바탕으로 기민하게 위험을 눈치챈 사람들일 것이다. 즉, 우리는 두려움 덕분에 살아남은 조상의 후손으로 두려움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불안은 인간을 살게 만든 가장 중요하고, 누구나 가진 보편적인 정서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신체,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이었다. 맹수에게 해를 입는다거나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맞닥뜨리거나. 이를 대비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두려움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다. 갑자기 산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려움의 현상, 즉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불안을 피해야 하는 걸까 이겨내야 하는 걸까?
전쟁터 같은 곳이 아니라면, 현대에 사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란 인지적인 생각 속의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직장을 못 가질까 봐, 대인관계 속에서 창피함을 당할까 봐, 성공하지 못할까 봐 하는 등의 것이다.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두려움이 아닌, 내가 가진 어떤 생각의 두려움인 것이다. 따라서 사실 우리 사회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 중에 피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실제로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려움을 맞닥뜨려 해결하고, 경험 회피를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말로 하면 쉽게 느껴지는 것과 달리 실제로 행할 때는 그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잘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별 게 아니라고 인지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막상 두려움의 상황에 처하면 감당하기 어렵다. 두려워하는 상황이나 대상에 자신을 노출하고, 경험 회피를 하지 않으면 치료가 잘 되겠지만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마음 챙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는 힘
우리가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마음 챙김’이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을 쉽게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은 다 지나간다는 것을 배우고, 소위 ‘현존(現存)’에 집중하는 것. 감각에 관한 집중능력과 힘을 기르면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사실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집중하고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마음 챙김’의 힘을 키우면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을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우리가 있는 현재의 자리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두려움은 사실 그 원인 자체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 속에서 더욱 커진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안 좋은 쪽으로 주의가 쏠릴 수밖에 없다. 마음 챙김을 한다는 건 감정과 생각이 아니라 개인이 현존하는 그 자리로 주의력을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과 오감 쪽으로 내 주의를 빼는 훈련을 할 수 있다면, 두려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에 노출하는 것만큼의 큰 효과가 될 수 있다. 노출과는 전혀 다른 치료 개입인 것이다. 두려움에 노출하고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안 될 때는 마음 챙김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을 추천한다. 마음 챙김을 하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 현존하지 못했구나, 내 생각이 감정과 미래, 힘들었던 과거에 가 있었구나.’를 알아차리고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상당히 편안해지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음 챙김은 자신이 들어가 있는 두려움에서 거리를 두고, 그 두려움을 알아차리며, 관찰자 입장으로 볼 수 있음으로써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권장할 만하다.
인간은 잘 존재하기 위해서 사는 것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불안』에서 사회적 지위(Status)와 관련된 불안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포지션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사회가 발전하면서 불안의 유형은 계속 달라진다. 원시시대에서는 생존을 위한 불안이 있었고, 요즘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불안이 추세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감염병에 의한 불안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유형의 불안을 마주하게 될까? 그리고 수없이 닥칠 불안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인류가 앞으로 맞닥뜨려야 하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실존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지금까지 시대는 성공 지향적으로 달려왔다. 사회와 발전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함께 있던 셈이다. 하지만 사회적 권력 획득이 정말 행복에 가까울까에 관한 의문을 바탕으로 개인 자체에 가치의 방향이 전환되는 시대가 왔다. 죽을힘을 다하면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경쟁은 개인의 삶에 별 의미가 없어졌다. 자신의 삶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쪽으로의 방향 전환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존재와 실존에 대한 고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일까.’에 관한 두려움과 불안은 날로 커지는 추세다. 인간은 유한하고 생명 또한 제한되어있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결국 세상을 향한 질문은 스스로 돌아오고 존재론적 불안이 엄습할 가능성이 크다.
존재론적 불안은 사실 언제나 있었다. 특히 나이가 들고 곧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많이 느낀다.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고 살았을까?’, ‘나는 뭘까?’ 던지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는 것은 태어난 이상 죽음에 가까워져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잘 존재하는 것은 곧 우리가 사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본인의 가치와 존재에 대한 고민은 어려운 문제이며, 두려움과 불안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욱더 그러하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는 것에 온 힘을 다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Human Being'이다. ‘Human Doing’이나 ‘Human Having’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을 가지거나 잘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잘 존재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에서는 건강의 정의를 ‘well-being’으로 내린다.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잘 있는 게 건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잘 있는 게 뭘까?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성공하는 걸 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여기에 확답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의 경우, 생명이 끝나갈 때가 돼서야 이에 대한 대답을 조금이나마 내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다고 해서 그게 잘 된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깨닫기 어렵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우리가 얼마든지 살아갈 날이 많고, 현실에 처해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잘 있기 위해서, 결국 잘 존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계속 생각해야 한다. 이게 잘 안 될 때 소위 이야기하는 ‘아노미(Anomie)’가 오게 되며 정말 불안해지고 두려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