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박초연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웬만한 일을 하더라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비 고1이라 공부 계획을 세웠는데 너무 욕심부려서 제가 해낼 수 없을 걸 예상도 못 하고 하루마다 공부량을 너무 많이 할당해서 고등학교 가기도 전에 무기력증에 걸린 것 같기도 합니다.
매일같이 남은 공부를 내일로 미루고, 해야 할 걸 왜 안했냐며 자신을 몰아세웁니다. 결국 며칠 후 밤새 밀린 공부를 다 끝내면 성취감이나 "비록 공부를 미루긴 했지만, 밀린 걸 끝내기라도 해서 다행이다" 하고 대견함이 조금이라도 들 법한데 저는 진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밀린 공부를 마치고 새벽 4시에 잠이 들더라도 "이렇게 힘들 거면서 왜 미뤘냐. 진짜 너무 한심하다"하는 감정만 듭니다.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정말 작은 것부터 해내기로 했습니다. 청소하기, 책 읽기, 화분 물 주기 등 힘들다는 느낌 없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걸 해내도 성취감이 전혀 없습니다. 공부 계획을 갈아엎어서 매일매일 안 빠지고 한 달간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게도 해봤는데 역시나 성취감이나 뿌듯함이 없었습니다.
제가 성취감을 느끼는 기준치가 제 능력에 비해 시험 100점 맞기, 문제가 4000개나 있는 문제집 다 풀기 정도 수준으로 너무 높은 걸까요?
도대체 제가 무엇 때문에 성취감을 못 느끼는 걸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초연입니다.
사연 주신 분은 무엇을 해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셨네요.
우선적으로는 사연자분이 공부를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취감이라는 것은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는 느낌을 말한다고 합니다. 사연자님의 목적한 바는 무엇인가요? 그 목표는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정해진 것인가요?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각자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대학 입학이나, 진로선택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라면 아무래도 공부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목표가 있는지 충분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요.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말이죠.
그런데 뚜렷한 목표가 있더라도 어떤 것을 해도 성취감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경우에 그런데요. 완벽주의란 일을 제대로 하려는 욕구, 세부사항에 대한 집착, 실제 수행에 대해서는 평가절하를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기대치가 높고, 조금의 결점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할수록 좌절이 크고 스트레스가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연자분 마음 안에는 엄격한 기준을 가진, 과도하게 비판을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해요. 그 자아는 어떤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내적 기준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혹평을 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압박을 합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분들은 어린 시절 즐겁게 놀거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는 충분히 격려받지 못하고 자기를 통제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엄격한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는 경험은 부족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엄격한 기준이 생기게 된 데에는 ‘나는 결함이 있다’라는 인지왜곡이 기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완벽하다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죠. 나는 부족하고, 결함이 있다는 생각이 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어떤 일을 해도, 어떤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연자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계획을 달성했는지 아닌지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충분히 격려해주고 인정해주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부족한 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높은 기준의 모습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의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주세요.
제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