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대한 사회적 편견 3편
[정신의학신문 : 경희대학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 반건호]
아이슬란드는 지질학적으로 북아메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며, 두 대륙판 사이를 잇는 다리도 있다. 다리로 연결된 두 대륙 모두 지구의 일부이지만, 북아메리카와 아시아, 유럽이라는 전혀 다른 지역임을 알고 있다.
자살과 자해도 마치 이들 대륙판의 관계처럼 작은 틈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 둘 사이의 틈새 아래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자해는 자살의 사전 조짐인가? 전혀 서로 다른 행위인가?
수년 전 봄, 소아청소년정신과 외래에 손목 긋기 자해 청소년이 갑자기 늘었던 적이 있다. 2009년 이후 청소년 사망원인 중 자살이 가장 많은 원인이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신과 의사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해가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당시 필자와 동료들이 원인 중 하나로 꼽은 것은 미디어의 영향이었다. 학생 대상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 상위 입상자가 자작곡에서 힘들면 손목긋기 자해를 했다는 가사를 노래하였다. 해당 출연자가 상위에 입상하기도 하였고, 그의 노래하는 품새나 분위기에 매료된 청소년들이 손목 긋기를 모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도 자해 증가가 자살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는 어렵고,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손목긋기 자해 사례를 통해 자해의 의미를 분석해 볼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인 조앤 로링이 저술한 ‘캐쥬얼 베이컨시’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수크빈더는 파키스탄계 영국 의사 부부의 둘째 딸이고 자해를 반복한다. 언니나 남동생에 비해 공부도 못하고 외모도 못났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털이 많고 원숭이 같고 느리고 멍청하다는 경멸, 야유, 모욕을 당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수크빈더는 밤에 자기 방 토끼 봉제인형 속에 숨겨둔 면도날로 이미 흉터투성이인 팔뚝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며 자기혐오를 달래곤 한다. 수크빈더가 자살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친구의 사고를 돕는 과정에서 딸의 상처를 발견한 부모는 수크빈더의 고민을 알게 되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한 수크빈더는 자해를 멈춘다.
수크빈더의 행위는 ‘자해를 통해 부정적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기’, ‘대인관계 어려움 해소하기’, ‘긍정적 느낌 유발’에 해당하며, 이는 정신장애분류 중 ‘자살이 아닌 자기 손상’에 부합한다. 이러한 ‘자살이 아닌 자기 손상’ 또는 ‘의도적 자해’는 ‘자살’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고 있다.
자살은 모두에게 큰 슬픔을 남긴다. 언제, 어디서, 누가 경험하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고 그 이유를 알기도 어렵다.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게 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자살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1968년 미국자살학 협회의 제1차 연례학술대회를 들 수 있다. 이후 학문적, 사회적, 공개적으로 자살 행위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관련 학술지도 발간되고 있다. 자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예방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보건복지부의 ‘중앙자살예방센터’나 교육부의 ‘자살과 학생정신건강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성인은 물론 초중고 학생의 자살대책활동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근 자살과 학생정신건강연구소에서는 173명의 학생자살 사망자 심리부검 결과를 토대로 세 가지 청소년 자살 유형을 발표하였다.
첫째, ‘조용한 유형’은 대상자의 49%에 해당하며, 우울증 병력이나 가정문제를 찾아보기 어렵고, 이전 자살 시도 병력도 없었다.
둘째, 24%를 차지하는 ‘환경위험 유형’은 대부분 가정에 문제가 있었고, 우울증이나 비행 경력이 일부에서 나타났다. 이전 자살 시도 병력은 없었다.
셋째, ‘우울 유형’은 27%로 우울증이나 불안증 등 정신장애가 상당수에서 있었고, 다른 유형에 비해 자살 시도가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있었다.
문학작품 속 청소년 자살 사례를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캐쥬얼 베이컨시’ 등장인물 중 수크빈더의 친구인 크리스탈이 어느 날 갑자기 자살로 사망한다. 자해시도가 없었고 자살 의도를 비춘 적도 없었다.
크리스탈의 어머니는 미성년일 때 크리스탈을 낳았다. 크리스탈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이 있고, 마약중독으로 재활원을 드나드는 어머니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학교 조정부에서 운동 재능을 발휘하며 제대로 된 건강한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크리스탈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인정하고 후원해주던 시의원이 뇌출혈로 사망하고, 마약 중독 어머니에게 필요한 재활원이 폐쇄되고, 어머니 남자 친구인 마약상에게 강간당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한다. 남동생이 익사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치며 자살한다.
장례식에서 수크빈더는 묻는다. “크리스탈의 자살을 막을 수 없었을까? 신의 빛은 모든 영혼에서 빛난다는 것을 누구라도 크리스탈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전 자살 시도나 자해경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환경위험 유형 자살’에 해당한다.
또 다른 청소년 자살 사례로 2007년 발간된 동명소설을 넷플릭스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하여 2017년부터 방영한 ‘13 reasons why’ (한국제목,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여주인공 해나 베이커를 들 수 있다.
그녀는 같은 학교 남학생에게 강간당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구해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상담교사와 나눈 대화에서 자살시도자의 심정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선생님은 제가 가게 두었지요. … 아무도 저를 막기 위해서 나서지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신경 써주셨지만, 충분치 않았어요. 그건 바로 제가 알아내야 했던 거예요.”
크리스탈의 자살과 수크빈더의 자해는 상당히 다른 특성과 경과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서 해나 베이커처럼 자해와 자살을 구분하고 예후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자해가 수크빈더처럼 고통에 따른 ‘자살이 아닌 자기 손상’일 수 있지만, 자해는 여전히 자살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자살과 자해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고 대처 방법도 다를 수 있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심각한 고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1. 오미애, 박찬민, 이연정, 홍민하, 한주희, 등(2014). 정신화 이론에 근거한 청소년기 자해행동의 분석: ‘캐주얼베이컨시’의 수크빈더를 중심으로. 정신분석 25권 1호, pp24-32
http://pdf.medrang.co.kr/PSY/2014/025/PSYCHOANAL-KO.2014.025(01).024-032.pdf
2. Hoin Kwon, Hyun Ju Hong, Yong-Sil Kweon (2020). Classification of adolescent suicide based on student suicide reports. Journal of the Korean Academy of Child and Adolescent 31권 4호, pp169-176.
https://doi.org/10.5765/jkacap.200030
3. Geon Ho Bahn, Joo Seok Park (2021). A Multifactorial Interpretation of a Teenager’s Suicide: Based on Krystal’s Death in Casual Vacancy. Journal of the Korean Academy of Child and Adolescent 32권 1호, pp3-9.
DOI: https://doi.org/10.5765/jkacap.2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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