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현의 [공황장애 알아보기] (18)

[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40대 중반의 A씨는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여행을 좋아했었다. 20대 초반에는 국내외 여러 곳을 다니며 자유로이 젊음을 만끽했었다. 기차를 이용한 여행이든, 도보 여행이든, 자동차 여행이든 모두 A씨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던 A씨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얼마간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A씨에게 여행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낀다. 30세의 봄, A씨는 지방의 멋진 경관을 촬영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사진 촬영 의뢰가 한참 많이 들어오던 때라 밤늦게까지 사진 편집을 하던 A씨는 꽤나 피로감을 느끼던 상태였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다가 졸음에 살짝 눈이 감기는 순간 뒤에서 오던 트럭의 “빵!” 하는 경적 소리에 화들짝 놀란 A씨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긴 터널에 진입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진 터널을 한참 동안 달리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점차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지만 정신을 잃으면 금세라도 거침없이 내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공포감은 터널을 달리는 내내 계속되었고, 겨우 터널을 빠져나온 A씨는 갓길에 차를 대어 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던 A씨는 한참을 고민하다 견인차를 불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A씨는 차를 몰고 먼 거리를 운전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먼 거리를 가게 되면 언제라도 그때 겪었던 공포가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용기를 내어 몇 차례 운전대를 잡아 봤지만, 고속도로 진입로 직전에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일도 많았다. 또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병원이 없다는 생각에 인적이 드문 곳에 가는 일도 꺼려졌다. 해외여행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일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A씨의 삶의 영역은 극도로 좁아졌다. 어렵지 않게 하던 여행이, 이제는 꿈도 못 꾸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장거리 여행이 두려운 사람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행을 통해 생소한 것들과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공황장애는 설렘을 두려움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설렘과 공포, 두 감정은 모두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를 자극해 몸 전체를 활성화시킨다. 사실 공포감과 설렘은 몸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이 한 장 차이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공포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A씨는 공황발작과 공황장애의 경험을 통해, 여행을 통한 낯선 자극이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설렘은, 두려운 미지의 장소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고립감으로 대체되었다. 자동차를 운전해 먼 곳으로 나가는 것이, 마치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30세 되던 해의 봄, 고속도로에서의 아찔한 기억은 A씨가 여행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감정을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A씨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그 좋아하던 여행을 포기하고 살아야만 했다.

 

직면하기: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기

두려움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직면이다. 두려움을 마주할 때, 우리는 피하고 싶은 본능을 느낀다. 생존을 위해서는, 두려운 대상을 일단 피하고 보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일 테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굳이, 억지로 피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라면?

공황장애는 바로 그러한 상대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는 소문만 무성한 위대한 마법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마법사의 실체는 늙고 힘없는 노인이었다. 직면은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는다. 반대로 두려움의 대상은 우리가 피하려 하면 더욱 두려워진다. 또 두려움을 계속해서 피하기만 한다면, 두려움은 다른 영역으로 번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힘들었던 A씨가, 점차 대중교통 사용과 외부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속성 탓이다.

A씨는 영원히 자신이 사는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다행히 A씨는 치료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10년 간 잃어버렸던 설렘을 다시 찾고자,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처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까운 옆 동네의 마트를 다녀오고, 또 차를 몰고 근거리에서 장거리까지 조금씩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자녀들과 함께 놀이 공원에 가는 시도도 했다.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마다,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되뇌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도전을 계속해 갔다. 짧은 글로 담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과 성취와 환희의 순간이 여러 차례 교차되며 그의 삶은 점차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직면의 과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 쌓인 회피 습관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에 한 발자국씩. 아니, 반 발자국씩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A씨에게도 옆 동네의 마트를 다녀오는 처음의 시도가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 첫 시도를 통해 얻은 자신감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 중요한 건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일 테다.

직면의 과정은 다양하다.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덜한 상황에서 두려운 상황으로 단계적 노출을 진행하는 체계적 탈감작(systematic exposure)이 주로 사용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낮은 수준의 불안을 유발하는 노출 상황과 다소 높은 수준의 상황에 번갈아가며 직면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가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직면 전 준비 과정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을 유발하는 자동적 사고를 살피고, 상황에 마주하는 중간중간 호흡을 가다듬고 몸과 마음을 이완한다. 불편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 마음은 그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적응해 나간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실은 굉장히 지난한 과정일 테다. 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정을 안내할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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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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