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김예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때로는 우리의 일상이 특별한 일이나 사건 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매일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크지 않더라도 미세한 감정들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예를 들면 급한 일정에 늦을까 초조하던 찰나, 닫혀가던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러준 낯선 이의 배려 덕분에 안도하며 감사함을 느끼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요. 단골이 된 식당이나 카페에서 서로를 알아보며 나누는 반가운 인사 한마디, 머리를 자르고 온 다음날 그 변화를 알아차려주는 누군가의 작은 관심 덕분에 문득 미소 짓게 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사람 때문에 받는 상처가 반복되다 보면 차라리 말투까지 지정할 수 있는 친절한 인공지능(AI)과 대화하는 편이 낫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AI가 우리 곁에서 점점 더 다정한 말을 건네는 시대일수록, 사람 사이의 다정함은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오늘은 이 편지와 함께 소개해드릴 책을 통해, 이미 다가온 AI의 시대에도 여전히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다정함의 힘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다정함’을 떠올리면 흔히 상냥하고 친절한 성격이나 태도를 먼저 떠올리곤 하는데요. 그러나 다정함은 서로의 기분이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의 몸과 마음이 안정될 수 있도록 ‘안전하다’는 신호로 작용해 회복과 건강을 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켈리 하딩은, 설명되지 않는 신체 증상들이 반복되는 장면 앞에서 질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치료를 받아도 어떤 환자는 스트레스에서 더 빠르게 회복하고, 어떤 환자는 같은 상황에서도 더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관계 속에서 느끼는 친절, 공감, 신뢰, 그리고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의 경험 같은 사회적, 환경적 조건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정함의 과학>에서 저자는 ‘다정함’을 감성적인 미덕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정함을 건강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놓고, 관련 연구와 임상 사례를 통해 그 의미를 차근차근 강조합니다.
“숨은 요인들을 나타내는 고리 그림의 가운데에는
개인, 바로 당신이 있다.
당신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것은
매일, 매 순간 당신이 참여하는 사회적, 환경적 모체다.”
이 책의 원제인 ‘토끼 효과(Rabbit Effect)’는, 고지방 식단이라는 동일한 위험요인에 노출되었음에도 어떤 토끼는 건강이 뚜렷이 악화되는 반면 어떤 토끼는 그렇지 않았다는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그 차이를 가른 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식단이나 유전자 같은 요인만이 아니라, 특정한 토끼를 보살핀 연구자의 돌봄과 애정, 그리고 관계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지요. 만성 스트레스는 마음 건강뿐 아니라 교감신경계와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HPA) 축을 과도하게 활성화시켜 수면, 염증, 통증, 면역, 대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저자는 친절과 다정함, 포옹이나 따뜻한 접촉, 신뢰 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전감이 높아지는 경험이 스트레스 반응을 완충하는 ‘사회적 완충(social buffering)’으로 작용해, 회복을 돕는 생리적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동물 연구에서도 뒷받침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무관심에 따라 DNA 메틸화와 탈메틸화가 일어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는 대목은, 유전자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더라도 세포의 성질이 후성유전적으로 조절되며 기능과 반응이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데이터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제 운동이나 식단, 수면만큼 사회 참여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수많은 연구 결과가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웃음과 따뜻함, 존경, 신뢰, 배려, 지지는 신체 건강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사회적 거부, 거절, 배제의 경험은 뇌에서 ‘사회적 위협’으로 해석되기 쉬워, 통증을 처리할 때와 유사한 뇌의 회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연구들도 알려져 있습니다. 원치 않는 이별 뒤 실제로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지듯 아픈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해볼 수 있겠지요. 여기서 사회적 거부는 꼭 노골적이고 강렬한 배척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무시, 냉소적이거나 비꼬는 대답, ‘그 정도는 다 힘들어’라는 식의 감정 무효화(invalidation) 같은 작고 반복되는 비친절 역시 뇌에는 위협의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사회신경과학(social neuroscience)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해온 연구자인 존 카치오포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는 외로움을 ‘혼자 있음’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지각된 사회적 고립(perceived social isolation)’으로 정의해왔는데요. 그리고 외로움이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거절당하거나 고립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물리적인 위험에 처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고, 두려워하며, 과도하게 불안해한다.
이 것은 실제 생리학적 반응이다.
뇌 영상 연구에 따르면 뇌는 사회적 거부와 신체의 고통을 비슷하게 처리한다.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끼면
뇌는 그것을 실제로 칼에 찔리는 것과 비슷한 고통으로 인식한다.
[...] 외로움은 드러나지 않게 신체를 아프게 한다.”
AI의 전폭적인 공감과 위로, 다정함에 이미 많은 도움을 받고 계신가요? 다정함은 나를 살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AI가 생성해내는 다정한 언어나 소리는 능숙해 보일 수 있어도,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고 돌보며 만들어온 언어와 표현을 학습한 결과입니다. 시인 나태주는 한 인터뷰에서 <불안사회>의 “인공지능에게 에로스는 없다. 인공지능에게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를 인용하며, 인공지능에는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점을 짚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 다정함이 말의 형태로는 충분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온기와 상호성까지 완전히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가능하게 한 시작이 언제나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살린 다정함이 다시 나로부터 진심을 담아 시작되어 흘러갈 때, 누군가의 하루를 덜 외롭게 하고, 회복시키고, 때로는 살릴 수 있는 힘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다정함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감정에 공감하는 순간에서부터 상대의 생각과 관점을 이해해보려는 시도, 혹은 친절을 실행하는 작은 행동에 이르기까지 다정함은 정서, 인지, 행동의 여러 층위에서 표현될 수 있지요. 우리가 다정함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숙하더라도 “타인을 보살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막대한 능력”임을 기억하면서요. 작은 친절과 소소한 배려(micro-kindness)를 통해 다정함을 주고받으며, 그 파급 효과가 상호적으로 퍼져나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회복시키기를 그려봅니다. 다정한 서로의 존재가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여전히 소중히 여겨지고, 서로에게 필요로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건강과 안녕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마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들에게 달려 있다.
[...] 우리 개인의 행동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잔물결을 남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긍정의 물결을 일으킬수록 진폭은 더 커진다.
모두 함께 강력한 긍정적인 변화의 파도를 일으킬 수 있다.
[...] 우리는 함께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김예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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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소개해드리는 [Sincerely yours,] 시리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관점과 추천이 반영된 책을 읽고 싶어 하시는 환자분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며 필요성을 느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편지나 이메일의 끝인사로 사용되는 'Sincerely yours,'는
'진심을 담아' 또는 '당신의 진실한 -로부터'라는 뜻으로
매우 정중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진료실에서 나누는 상담이 가진 기억 지속 시간의 한계를 넘어,
평소에도 소지할 수 있는 문자화된 책을 통해 진료실 밖에서도
환자분들이 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정신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직접 책을 읽고, 책을 처방해봅니다.
궁금했던 책이나 고민이 있으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향후에 알맞은 책을 찾아 소개해 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계시고 다음 편지에서 또 뵐게요.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 졸업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치료 전문과정 이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5 세종도서 선정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