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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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10대 후반 여학생입니다. 부모님은 좋고 착하신 분들입니다. 제게도 이웃과 잘 지내고 남들을 배려하고 베풀면서 착하게 살라고 교육하셨어요. 제가 분명 중학생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고등학생 때부터 가족마저 계산적 도구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빠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 엄마는 집안일 해주는 사용인처럼 보이고, 언니랑 동생은 심심하면 저랑 같이 놀 사람 혹은 편의적 이유로 자원을 공유하는 사람 정도로요.

 하지만 저는 가족들에게 이런 생각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좋은 딸인 척 지내죠. 부모님을 사랑하는 척 애교도 부리고 그냥 같이 잘 지내요. 심심하면 같이 보드게임하고 그러면 재밌어요. 신나고 방방 뛰기도 하고요.

 근데 화나게 하면 감정이 바로 바뀌어요.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속으로 엄청 욕을 해요. 엄청 사소한 일이지만 저를 조금이라도 짜증 나게 하면 욕을 엄청 해요. 나를 재밌게 해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용돈 주는, 같이 사는 도구에서 나를 화나고 짜증 나게 하는 천하의 쓸모없고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그렇다고 제가 사회성이 부족하진 않아요.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 사니까요. 근데 객관적으로는 이 감정, 분노나 짜증이 비이성적이고 너무 격양되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도...일단 제 감정이잖아요. 제 가슴 속에 다 있단 말이죠.

 친구 관계에서는 제가 매우 친하다고 생각하면 그 친구들을 도구 그 자체로 보지는 않아요. 뭘 사주기도 하고요. 가족만큼 붙어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화를 느낀 적도 별로 없고요. 근데 ‘지금 이렇게 친해도 나중엔 어차피 다 갈라지고 어색해지고 남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친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면서도 ‘어차피 떠날 사람, 어차피 내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 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가족과 친구 중 고르라면 가족을 고를 거예요. 배신 가능성이 제일 적고, 친구보다 저를 더 도와주니까요. 그냥 이성적으로 아는 거예요. 가족이 나를 더 사랑하니까 나를 더 도와줄 거라는 걸요.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친구보다는 가족이에요.

 저는 엄마와 포옹을 해도 사랑이 안 느껴져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느껴지지만, 제가 엄마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엄마를 속이기 위한 보여주기식 포옹이에요. 예전에 엄마가 아빠의 바람을 의심하고 힘들어하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에게 먼저 다가갔어요. 하지만 엄마가 힘들어 보여서가 아니라 엄마가 빨리 정신 차렸으면 좋겠어서...짜증이 났어요. 엄마를 달래고 공감하는 척했지만요. 가까운 친구에게 얘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더니 제가 사이코패스 같대요.

 성인이 되면 바로 독립하고 싶고 가족이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집에서만큼은 연기 안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보통 부모님과 집안이 쓰레기면 자식이 부모를 미워하고 차갑게 대하는데, 전 그런 경우가 아닌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언니나 동생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집안을 좋아하는데 말이죠.

 저는 부모님이 죽어도 사랑해서 슬플 것 같진 않아요. 아빠가 죽으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우울할 거 같고, 엄마가 죽으면 한부모 가정이 되는 게 싫고, 집안일 해주고 날 케어하며 사랑해 줄, 집안을 지켜주고 늘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없어져서 슬플 것 같아요. 그냥 날 만족시킬 역할이 필요한 거지 부모님 그 자체를 사랑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왜 이런지 궁금해서 정말 검색도 많이 해봤어요. 감정표현불능증, 인격장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근데 몇몇 비슷한 요소는 있어도 딱 이거다 할 만한 건 못 찾았어요. 제가 어떤 인간인지 왜 이런 건지 모르겠고 궁금해요.

답변)

 안녕하세요. 혼자 오랜 시간 고민하셨을 부분을 용기 내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연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사연자님이 자신의 마음을 깊이 있고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과 혼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그 감정의 뿌리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굉장히 깊게 다가왔습니다.

 사연자님은 본인이 감정적으로 메말라 있고 사랑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본인을 깊이 들여다보신다는 점에서 결코 감정이 메마르거나, 냉정한 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섬세해서,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기보다는 곱씹고 고민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다루고 있으신 것 아닌가 싶은데요.

 사연을 보면 가족을 '기능'이나 '도구'처럼 바라보게 되는 자신의 시선을 낯설고도 불편하게 느끼고 계시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아빠는 돈을 버는 사람, 엄마는 집안일하는 사람, 언니와 동생은 놀이나 자원을 공유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고백은 언뜻 들으면 차가운 감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단순히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연자님께서 관계 속에서 역할이나 기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신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어떤 행동을 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거나, ‘착해야 칭찬받는다’, ‘잘해야 인정받는다’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조건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역할을 해 주는가’를 먼저 보게 되고, 그 역할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순간 실망감이나 분노가 격렬하게 튀어나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가까운 사람, 특히 늘 함께 있는 가족일수록 더 쉽게 감정이 요동치고 관계의 의미가 헷갈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사연자님께서 표현하신 감정, 즉, 겉으로는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극단적으로 분노하거나 실망하는 자신을 느끼는 모습은 정서적인 조절이 어려울 때 자주 나타나는 반응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좋게 느꼈다가 아주 사소한 일로 완전히 싫어지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잘 지내는 척을 하게 되는 이런 흐름은 흔히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반복되는 관계 패턴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감정 흐름은 사연자님이 타인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받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심리를 반영합니다. 너무 가까운 사람이 기대에 못 미치면, 마치 배신당한 듯한 느낌이 들고, 그러한 실망감이 분노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연기’를 통해 상황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는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했을 때 외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어머님과의 관계를 예로 들며, "포옹해도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느껴지지만,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특히 가슴 아팠는데요. 이는 단순히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는 상태’에서 오는 혼란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거나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으로 학습되었거나,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을 경우 청소년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중학생 때는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고등학생이 된 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그 시기에 혹시 가족들로부터 크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낀 경험,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가족에게 사랑을 주었는데 내가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았거나, 온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깨진 경험이 있었는지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좋은 분이시고 사연자님을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왠지 모를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불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고 누적된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신과 떠남, 혼자 남음에 대한 두려움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사연자님은 마음을 쓰고 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차피 떠날 사람’, ‘결국은 남이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진심으로 연결되는 데 거리감을 느끼신다고 하셨는데요. 이런 감정은 사연자님이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는 경험 자체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고 연결되는 것에는 언제나 상실과 실망의 가능성이 따라오기 때문에, 차라리 애초에 거리를 두고 스스로 방어하는 방향을 택하고 계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이어지신 걸 보면, 그만큼 자신의 감정 상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사연자님을 사이코패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자기성찰이 거의 없는 반면, 사연자님은 타인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무 민감하기에 감정을 억누르거나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쪽에 더 가깝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연자님은 지금 감정과 관계, 애정의 감각이 다소 왜곡되고 삐걱거리는 상태에 계신 것이 아닐지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는 사연자님의 잘못도, 성격적 결함도 아닙니다. 단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연결 짓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차이를 이해하고, 더 건강하게 바꿔보려는 시점에 계신 것이고요.

 이런 경우에는 전문적인 심리상담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상담을 통해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억눌린 마음을 하나씩 마주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상담은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현재 상담을 받기가 어려우신 상황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연자님의 마음속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무엇인지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이 정말 가족이나 친구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혹은 사랑했지만 버림받거나 멀어졌을 때 느낄 외로움과 고립감이 두려운 것인지 말입니다.

 또, 사연자님이 갖고 계시는 ‘언젠가 우리는 다 멀어질 거고 결국 남이 될거다’라는 믿음의 출발점을 깊이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친구 관계에서 멀어지는 관계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깊이 있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을 텐데 왜 사연자님의 마음속에선 ‘어차피 다 멀어질 관계’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찾아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생각이 정말 맞는 것인지, 타당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연자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도 살펴보면서 내가 충족되길 원하는 욕구에 관한 탐색을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 혼자되는 것, 배신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마음의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고, 혼자되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를 깊이 믿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요?

 사연자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 지금 스스로 묻고,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이런 자기 탐색 자체가 이미 성숙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건강하고 깊은 감정 경험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단정 짓기보다, 지금처럼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걸 멈추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장승용 원장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인하대병원 인턴 및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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