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안녕하세요. 엄마와의 관계에서 고민이 있어 사연 남깁니다. 저희 엄마는 완벽주의가 있으세요. 모든 일이 본인 계획대로 컨트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불안해하십니다. 제가 봤을 때는 약간 자기애적 성향도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힘들어하거나 눈물을 보이면 “네가 울면 나도 힘드니까 울지 마라.”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면 저는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는 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 결핍에 대한 원인을 찾다 보면 엄마에게서 기인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엄마의 삶을 보자면 한부모 가장으로서 저를 어렵게 키우면서 굉장히 힘들게 사셨습니다. 스트레스로 많이 아프시기도 했고요. 엄마는 제 우울증과 불안장애, 정서적 결핍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로서 엄마의 기구한 인생을 알기에 크게 원망은 하지 않아요. 또 저를 키우시면서 경제적으로는 항상 풍족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셨거든요. 엄마가 차려 준 저녁이라든지 비 오는 날 데리러 오신 것... 그런 것들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만 얼마 전 처음으로 엄마에게 제 속에 있는 말을 일부 꺼내 놨어요. 엄마의 나르시시즘과 상처 주는 언행들, 다그치는 말투... 엄마의 짜증스러운 윽박에 참다가 저도 충동적으로 내지른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마음 중 일부만 내보인 것인데 엄마는 처음에는 소리 지르며 우시다가 이내 제 카톡에 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죄책감이 들어요. 처음에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는 너무 후련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를 어렵게 키워 준 엄마를 욕보였다는 죄책감과 그래도 내 솔직한 감정을 내보여서 느끼는 후련함의 양가감정일까요? 카톡에서 답이 없는 엄마와 영영 멀어질까 봐 두렵기도 해요. 

살면서 어쩌면 이날을 기다려왔던 것 같은데 마음이 찝찝하네요. 웃긴 건 제 속마음을 내지른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고 그냥 좀 더 가다듬고 정리해서 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이 양가감정을 가진 채로 앞으로 엄마를 어떻게 대하고 정서적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어렵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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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남겨 주신 사연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마음의 갈등으로 인해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평생 사연자님을 혼자 양육하며 고생하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사연자님의 힘든 마음을 몰라주고 본인의 감정만 표현하시는 것 같은 모습에 대한 원망, 서운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얽혀 마음이 무거우시겠군요. 

가족관계,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는 많은 이들에게 평생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 같으면서 또 반대로 가장 먼 것 같은, 혹은 멀어지기를 바라는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역시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부모로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로 인해 받았던 상처나 아픔이 때때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사연자님 역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이런 양가감정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통제적이고 요구적 성향이 강하며, 사연자님이 감정을 표현할 때 불편해하며 정서를 억압하는 모습을 보여 오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양육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사연자님은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며 적절하게 받아들여지고, 처리하는 경험을 하기는 어려우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울면 나도 힘드니 울지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연자님은 어떤 기분을 느끼셨을까요. 

자녀로서 부모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입니다. 힘들고 누군가 필요할 때, 위로가 필요할 때 우리는 부모님을 찾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이 거절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공감될 때, 우리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인정 경험과 함께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쌓여 우리의 자존감과 대인관계를 맺는 방식,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나의 솔직한 감정은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통제되기를 요구받으면 우리는 ‘진짜 자아’와 ‘거짓 자아’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내면에서 느끼는 생각이나 욕구, 감정과 외부에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 불일치하면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괴리가 커질수록 우리의 자아는 통합되지 못한 채 불안, 우울 등을 느낍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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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연자님 역시 이런 괴리감, 불일치감을 오랫동안 겪어오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 진짜 감정이나 욕구를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생각, 내 진짜 감정과 욕구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 어머니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행동하고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재화되어 끊임  없이 자기검열 장치로 작동해 왔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 자아’는 나쁜 것, 잘못된 것이며 ‘거짓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야 어머니께 사랑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져 왔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머니께 사연자님의 속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후련함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아무도 보지 못하고 꽁꽁 묶여 있던 ‘진짜 자아’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처음으로 밖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봉인 해제된 듯한 기분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물론 상자의 아주 일부분만 열렸기에 아직 하고 싶은 말,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물꼬를 열었던 이 사건이 사연자님에게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큰 임팩트를 남겼을 테지요. 

그렇기에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드러낸 이후 사연자님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느끼는 것도 당연합니다. 수십 년간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방에서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커튼을 걷어 젖히고 창문을 열어 햇빛을 마주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어둠에만 익숙했던 눈이 빛을 보고 눈이 부셔 한동안은 앞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빛에 눈이 적응하다 보면 마침내 햇살의 따스함도 즐기고, 창문 밖의 풍경도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언젠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사연자님의 마음,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그를 위해 어머니께서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 사연자님의 모습 모두 사연자님의 일부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것이 불편감이나 혼란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사연자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사연자님이 어머니와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어기제로서 작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현재에는 독립적이고 통합적인 인격체로서 기능하는 과정에서 과거에는 적응적이라고 여겨졌던 방식이 더 이상 적응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연자님은 지금 이 변화(shift)의 시기를 맞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숨기며 일방적으로 어머니께 맞춰드렸던 과거의 방식에서 조금씩 자신의 속마음에 솔직해지면서도 어머니와의 관계를 잘 유지해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지금 느끼시는 것처럼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고, 내가 어머니께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며 받아주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분노, 원망, 서운함 등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너무 불편하게만 받아들이기보다는,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하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연자님이 이제 비로소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게 해준 것 같아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시작을 응원하고 격려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어머니 역시 사연자님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함을 이해하고, 시간을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순응적이었던 사연자님이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조금씩 자기주장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 어머니로서는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사연자님이 본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어머니 역시 자신을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불완전한 사람으로서 이런 불안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서 사연자님의 마음의 전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더 가다듬고 정리된 형태로, 꾸준히 진심을 전하면서 말이지요. 어머니께서 받아들이는 부분,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받아야 한다고 기대하기보다는 어머니께 사연자님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은 지금 어머니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위한 첫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그 걸음걸음이 아직 미숙하고 흔들릴 수 있지만, 꾸준한 연습을 통해 언젠가 더 굳건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지금 느끼는 불편감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고생과 노고를 인정하면서도 사연자님의 진짜 자아를 어머니와 더 많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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