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을 위한 심리학4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페미니즘이 계속 사회적으로 이슈이다 보니, 뭔 뉴스만 나오면 단체 채팅방에서 사람들이 제게 대뜸 ‘이건 왜 그러는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요. 그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리 있게 잘 설명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면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될 것 같고…. 이런저런 마음이 앞서니까 정작 아무 말도 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집단의 친구들과 있을 때는 페미니즘에 대해 모르는 척하곤 해요. 나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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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해명하지 마라

‘자신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해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 같은 마음’으로 인해 괴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인가에 대해 누군가 궁금해하거나 비난하는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죠. 또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따라 온전히 자기 자신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잘 보호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시행착오를 경험할 권리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매끄러울 수는 없으니까요. 가면을 쓰는 행위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술술 대답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한결같이 당당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는 친구들의 기대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부여한 기대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을 잘 보호한다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얘기는 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구를 존중하는 것부터, 자신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은 만큼만 드러내는 것, 외부 또는 스스로 부과하는 압력에 못 이겨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걸 드러내는 일을 줄이는 것, 에너지와 시간의 불필요한 낭비를 막는 것,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과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 등 자신을 잘 보호하는 일에는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일 역시 포함됩니다.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서 우선순위를 잘 따져서 줄 것은 내어주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 필요하죠. 

 

내 상황은 내가 컨트롤한다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즉시는 대답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이후에 관련 내용을 찾아 이해한 뒤,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조금 더 준비된 상태에서 설명해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상황에 만족할 만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자책만 하는 것보다는 다시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지를 넓혀가는 게 훨씬 낫죠.

이는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인데요. 우리는 때때로 어떤 상황에 압도되어 주도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럴 때면 이런 마음이 들곤 하죠. ‘질문을 받으면, 어떤 질문이더라도 반드시 제대로 된 답을 해주어야 해. 지금 당장.’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갑자기 화투판을 벌이고 어서 치라고 재촉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판은 안 치겠다고 해도 되고, 광만 팔아도 되고, 물론 치고 싶으면 쳐도 되지요. 그러한 선택의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치고 싶지 않으니, 안 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쉬움 섞인 목소리, 빈정거림, 심지어는 비난까지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는 그쪽이 차라리 훨씬 낫습니다.

만약 그들의 질문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말을 가지고 있더라도, 선택지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선택지를 반드시 채택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선택의 열쇠는 언제나 자신의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만일 안전한 상황이라는 느낌이 들고, 상대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며, 본인도 말해주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말을 해도 됩니다. 원하는 만큼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감수할 수 있고, 감수할 수 없을지를 가늠해보는 건 이기적이거나 비겁한 것과 다릅니다. ‘해야 하기 때문’보다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더 많이 채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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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해보겠습니다. 상황을 컨트롤하는 방식은 다양한데요. 여러 명이 있는 상황은 대체로 변수가 많고 예상치 못하게 대화가 흘러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중요한 대화를 편하게 나누고 싶다면, 일대일의 상황을 만들거나, 그런 상황을 기다려보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단체 채팅방 상황 역시 비슷한데, 특히 텍스트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질 때는 대화의 흐름이 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말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단체방에서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요. 만약 이 상황을 충분히 컨트롤해나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답하지 않고 나중을 기약한다거나,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며 좀 더 편안한 상황을 상대에게 제안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어야만 합니다. 어느 누가 가시밭길로 다리를 뻗고 싶을까요? 만약 가시밭길에 꼭 다리를 뻗어야만 한다면, 적어도 자신을 보호할 장비는 갖추고 뻗는 것을 추천합니다. 자신을 잘 보호하는 일은 비겁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초자아 다독이기

이러한 마음고생의 이유 중 하나는 마음속에 강력하고 가혹한 초자아(superego)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기본적으로 이드(id), 초자아, 자아(ego) 이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이드는 개인의 각종 욕구와 소망으로 이루어지며, 초자아는 도덕적 양심과 스스로 추구하는 이상, 즉 자아 이상(ego ideal)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외부 세계와 개인의 내적 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요. 성숙한 개인이려면 이드, 초자아, 자아가 각자 적당한 크기로 존재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당한 크기’입니다.

 

초자아의 뜻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마치 크면 클수록 좋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초자아는 양심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돕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자아 이상을 통해 본인이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정하고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 죄책감이 들고 이상적인 나와 실제의 나의 간극이 클 때 수치심이 듭니다.

적당한 크기의 죄책감과 수치심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그러나 내적 세계에서 초자아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면 생각할 때, 감정을 느낄 때, 행동할 때마다 지나치게 자기 처벌적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초자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연료로 사용되어야 하는데 초자아의 처벌적·파괴적 기능만 남아 개인을 위축시키고, 경직되게 만드는 것이죠. 결국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채 스스로를 야단칠 틈만 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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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게 공정하다는 것

초자아의 불길에 다치지 않으면서도, 이를 활용하려면 초자아를 없애지도 키우지도 않고 잘 다독여야 합니다. 어떻게 다독여야 할까요? 이드와 자아의 기능을 함께 지지해주면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부끄러운지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어떤 욕구와 소망이 있는지(허황되고 쑥스러운 것들을 모두 포함해서), 현재 처한 현실에서 무엇이 나를 도와줄 수 있고, 무엇이 내게 불리한지, 나는 뭘 잘 견디고 뭘 잘 못 견디는지 모두 골고루 주목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죠. 예전에 저는 내담자들이 초자아를 잘 다독였으면 하는 바람을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라’는 표현으로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표현이 이미 사람들에게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은 나머지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대함’이라는 말이 낳는 오해였죠. “나한테 관대했다가 내가 진짜 별로인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해요? 잘못한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남에게 피해를 주는 한심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는 건가요?”와 같은 반응도 많았습니다.

그때 저는 자신에게 관대하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고삐 잃은 말처럼 자신 안의 욕구와 소망에만 휘둘리거나 현실이 건네는 유혹에 지배당할까 봐 초자아를 동원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표현을 바꾸어, ‘자신을 과연 공정하게 대하고 있는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중립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명분 아래, 실은 초자아의 편에서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죠. 자신이 맞는지 틀린지, 잘났는지 못났는지 말고도 자신이 무엇을 갖고, 먹고, 느끼고 싶은지, 무엇에 의존하고 싶은지, 현실의 무엇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지도 함께 물어봐주는 것이죠. 이런 질문은 자신의 잘못을 슬쩍 눈감아주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이죠. 적어도, 내가 스스로를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요.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에 수록된 에피소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요」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으며,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고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현재 광화문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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