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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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저마다 갈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무표정’입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마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이들처럼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깊게 패인 미간, 초점 없는 눈, 내려가 있는 입꼬리에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우리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갑니다. 더 안 좋을 때는 무표정 대신 화난 표정이 이를 대체하곤 하죠. 어린 시절에는 작은 일에도 까르르 잘 웃었고, 모든 게 즐거웠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바쁜 업무와 해야 할 일들, 가족과의 크고 작은 다툼이나 갈등,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와 경제적 부담 등... 현실을 떠올리면 이렇게 무감동, 무감정에 빠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싶긴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새인가 ‘불행 배틀’, ‘불행 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기고,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더 불행하고 힘든지, 마치 서로 겨루는 것처럼 불행 배틀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대 간, 계층 간 분열과 소득격차, 분배 문제 등으로 사회적 갈등을 경험하며 ‘불행 공화국’이라는 단어로 이 사회를 명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녹록지 않은 현실을 살며 많은 이들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2020년 OECD 우울증 유병률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36.8%로 1위를 차지해 국민 10명 중 4명이 우울증 혹은 우울감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유병율이 그 전에 비해 증가했음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치입니다.

 우울증 또는 우울감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인관계와 사회적 활동에서 위축되고 고립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 기억력을 비롯한 인지기능이 저하되고 집중력이 감소하여 학업이나 직업적 성취, 생산성에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우울감을 해소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바람 등으로 약물이나 알코올에 취약한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고, 심할 경우 중독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울증은 개인에게 많은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며 삶의 질과 만족도를 저하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울증은 자살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데, OECD 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에서 자살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입니다. 또, 우울한 개인이 사회적, 직업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생산성 저하, 실업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적 손실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세계은행은 우울증을 “생산적 경제생활의 가장 큰 도둑”이라고 칭하며 그로 인한 세계적 손실이 연간 2.5조 달러에 달한다고 보았습니다. 선행연구에서는 우울증이 실직 상태,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상태(원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 조기 은퇴, 가정이나 가족을 돌보는 것, 노동시간의 감소, 낮은 가계 수입, 낮은 교육적 성취, 기본적 생활 조건의 부족과 연관 있다는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는 우울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반대로 우울증을 야기하는 선행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울증의 지속과 함께 이런 사회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조건들이 계속해서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울감으로 인해 직장생활을 포기하기도 하고, 실직과 우울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그 상태에 고착되는 양상으로 굳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고독사, 126만 명에 달하는 청년 실업과 은둔형 외톨이의 증가 같은 사회적 현상은 우울증의 원인일 수도, 혹은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사회,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지지가 확보되지 않은 시스템 안에서 개인은 무기력과 절망감을 경험하고, 새로운 도전이나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주저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고립되고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우울이 심화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이룰 수 있는 기회와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담은 우리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할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모두가 불행한 사회, 우울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서로를 돌보지 못하고 개인화, 파편화되기 쉽습니다. 나 하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챙기고,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사회적 연결감과 공동체 의식이 약화된 사회는 재난이나 참사, 국가적 위기와 같은 공동체 차원의 문제 앞에서 취약하며 회복탄력성 역시 낮은 양상을 보입니다. 약화된 사회적 연결망과 소속감은 고립감과 외로움을 가중하며, 연대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나 강력 사건 역시 이런 공동체성과 사회적 유대감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울증과 관련된 사회적 조건과 우울증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서로 중첩되어 있고,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울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위험요인을 발견하여 우울증에 취약한 개인들을 보호하고 관련된 사회경제적, 문화적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대한정신건강재단이나 서울시 등 각 지방자치단체들에서는 마음건강을 위한 검진 및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본인 또는 주변에서 마음건강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러한 도움을 받아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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