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에 가 보면, 정작 올 사람들은 안 오고 그들에게 상처 받은 사람들만 가득하더라.”라는 말이 인터넷에 떠돌아 크게 공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진료실을 찾는 많은 환자분들이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괴로워합니다. 대부분 상처는 무례한 이들의 ‘막말’에서 비롯합니다. 조롱하고 비하하는 말들. 함부로 재단하고 무시하는 말들. 인신공격과 거짓말들. 비아냥거리고 공격하는 말들. 그 말들에 괴로워하며 우울에, 불안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정확히 인터넷에 떠도는 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정작 병원에 와야 할 미친 사람은 그 사람인데,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입니다. 자조적인 슬픈 표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말에 상처받은 분들이 정말로 무너지는 순간은, 그 막말을 끌어안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때라는 사실이 그 표현을 단순히 웃어넘기게만 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왜들 그리 무례하게 이야기하는 걸까요? 충고를 하건, 조언을 하건, 교육을 하건, 사적 관심을 보이건 사회적으로 지켜야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정말 그 말들이 상처가 되는 걸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정말로 나를 공격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까지 악한 걸까요? 많은 환자분들이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의도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분석들 또한 '막말하는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려 합니다.
막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사회적 규범과 맥락을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 눈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관계를 가벼이 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자라면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상처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후자라면 안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미필적 고의로 상처를 주는 셈입니다.
혹은 전혀 별개의 개인적 갈등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분풀이하듯 집어 던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상대방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 중 어떤 것이 나를 괴롭히는 그 막말의 정체일까요?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니 궁극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알게 된다면 어떤 것이 달라지나요? 사실 그런 것들을 연구해 봤자, 결국 상대방이 사회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남는 괴로움은 '나'의 감정입니다. 내가 상처 받았다는 것, 내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막말에 무너지게 될까요? 물론 기분 나쁘지 않은 막말은 없습니다. 원래 말이란 막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막말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가령, 길거리에서 부랑자가 갑자기 육두문자를 뱉으며 상스러운 막말을 했다 생각해보죠. 기분 나쁘고, 화가 날 것 같습니다. 깜짝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막말을 들은 것 때문에 이틀, 삼일, 일주일을 마음 아파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욕설들을 계속 떠올리고 곱씹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운이 나빴거니 하고 넘겨버리겠지요 아마.
그런데 만약 직장에서 상사가 “도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일을 하는 거냐, 이따위로 할 거면 때려치워라.” 같은 막말을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듣는 그 당장의 순간에도 속이 뒤집어질 듯 뭔가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큰 괴로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계속 머릿속이 뭔가 복잡해집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계속 그 말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다 같이 그 상사 욕을 한바탕 해줄 때는 잠시 후련해지다가도, 막상 밤에 혼자 누워있을 때는 문득 쿵하고 뭔가가 내려앉습니다. 마치 그 말이 다시 귀에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아니 거의 확실해집니다. 그러면서 상상하게 됩니다. 상상 속에서 아직 듣지 못했던 더 심한 말들까지도 듣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는 ‘진짜 내가 무능해서 그런 건 아닐까’ 같은 뼈아픈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게 불안과 우울에 빠져들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막말에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스스로 더욱 깊이 찌르게 되는, ‘나에 대한’ 막말에서 무너집니다.
결국 막말이란 '나에 대해' 아무렇게 던지는 말입니다.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말들이 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마치 정말로 새겨들어야 할 무언가 중요한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실제로 정말 고통스러운 막말들은 선의를 가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아끼니까 하는 말인데….",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따위의 말들로 시작하곤 합니다. 마치 귀한 걸 가르쳐 주기라도 하는 듯 배려와 예의를 잊고 불필요한 참견을 투척합니다. 결국 우리는 뾰족한 그 말을 품고 더욱 깊이 스스로 생채기 내곤 합니다.
[상처 받은 마음을 인정하고 알아차리기]
많은 분들이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라며 물어보십니다. 막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그들을 되려 부끄럽게 만드는 한마디를 던질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굳이 왜 멋지게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 무례함이 정말로 나를 깊숙이 찌르는 상처가 된다면 그때에도,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상처받고도 멋지게 대처하는 것이 과연 목표해야 할 만한 현실적인 모습일까요? 누군가 나를 칼로 찔렀다면 아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칼에 찔리고도 관운장처럼 덤덤히 되갚아주는 모습이 멋질 수야 있겠지만 말입니다. 모두가 관운장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막말하는 사람에게 품위 있게 대처하고 싶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막말에도 상처 받지 않고 싶다, 아파하지 않고 싶다는 뜻인 셈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괴로움이 시작되곤 합니다. 상처 받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따위에 상처 받으면 안 돼.', '그 녀석에게 상처 받다니 말도 안 돼.', '그건 상처 되는 말이 아니야, 새겨들어야 할 충고야.' 같은 말들은 상처 받기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말입니다. 막말을 들어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결국 무례한, 날카로운 말은 상처로 남습니다. 어느 부지불식간에 문득 떠오르며 살 속에 파묻힌 가시처럼 마음을 찔러 옵니다.
누군가 나를 칼로 찔렀다면 상처 받고 아파하는 것은 내 선택의 영역이 아니듯 말로 입은 상처 또한 그렇습니다. 살이 뭉텅 베어 나갔는데도 '이런 걸로 아파하면 안 돼.'라며 그 상처를 그저 외면해 버리기만 한다고 절로 상처가 낫지는 않습니다. 지금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도 나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방의 의도나 나의 잘못만을 복기하기만 하고 있다면 아픔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선 지금 상처 입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합니다. 상처는 무례한 그 사람이 준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무례한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이 나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튼튼한 철인이라 해도 송곳에 찔리면 아픈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나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스스로를 들여다볼 것인가, 방치하기만 할 것인가는 분명 나의 선택입니다. 우선 아픔을 받아들이고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상처받았다. 아프다. 괴롭다.'라고 말입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평가하기]
그래야만 상처가 불러일으키는 지금 이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려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생각들이 정말로 나를 위한 게 맞는지, 아니면 나를 2차 3차로 더욱 상처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막말은 분명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하지만 막말을 실제로 듣는 순간은 엄밀히 말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한순간의 말. 길어야 수시간 남짓의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막말이 비롯하는 생각들은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말’이니까요. 곱씹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휴일에도,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막말을 생각 속에 품고 있게 됩니다. 결국 그 짧은 순간은 일상 전체가 되어 나를 덮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뇌는 무언가를 시뮬레이션 하는 기능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복기하고 다가올 일을 예측하며 좀 더 적응적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때문에 쉬지 않고 상상하고 시뮬레이션 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어떤 순간에 조차도 뇌는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시뮬레이션이 막말을 재생하기 시작하는 순간 괴로움이 눈덩이처럼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의문들은 내가 들었던 막말 뒤에 숨어 있을 그 사람의 의도를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상상은 마치 그 사람이 직접 말을 하듯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더 날카롭고 무서운 말들을 생생하게 만들어 냅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들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내 험담은 듣는 이의 모습까지 선연히 떠오릅니다. 혹은 그런 말을 또 들으면 어떡하지? 하는 의문들이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내일, 모레, 내년의 막말까지 한번에 끌어다 재생시키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막말들이 말하는 바대로 정말 한심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스스로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됩니다. 상상할수록 더욱 괴로워지고, 괴로워질수록 상상은 더욱 자세하고 구체적인 현실이 됩니다.
우리의 뇌는 주의 깊게 상상하는 이미지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의 일들 사이의 감정적 경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국 막말에서 비롯한 수많은 상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실질적인 트라우마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은 그저 나의 상상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종이에 적어 보는 것도 좋을 수 있습니다. 하고 있는 생각들을 적어 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시 읽어 보면서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것은 나의 상상일 뿐이다. 막말을 스스로 되새기면 나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이 생각을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내려올 수 있습니다.
[막말을 내려놓기. 불가능한 노력을 내려놓기]
막말을 자꾸 곱씹게는 과정은 무의식적입니다. 때문에 시뮬레이션과 상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짐해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또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찾아올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에 가깝습니다. 막말을 떠올리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떠오른 생각들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할 것인지, 혹은 다른 생각을 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에너지를 공연히 낭비하기보다는, 그 생각이 찾아오는 순간마다 알아차리고 내려놓기 위해 연습해야 합니다. 물론 내려놓아도 다시 생각은 찾아옵니다. 마치 파도처럼, 지나가도 또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내려오려는 노력이 마치 헛되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질없고 힘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환자분들은 생각을 내려놓으라 권유드리면 “해 봤는데 소용없던데요.”라고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국 그 파도에 몸을 맡기고 휩쓸려가는 것은 더욱 큰 괴로움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생각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려는 노력은 분명 피로합니다. 하지만, 그 괴롭고 피로한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막말이 불러일으킨 상상은 상처를 두 배 세 배로 더욱 깊이 베어 낼 것입니다.
생각과 상상의 연쇄를 내려놓는 작업은 문제를 무작정 회피하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닙니다. 물론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막말한 사람이 뉘우치고 사과하는 것, 혹은 혼쭐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혼자서 괴로움을 회피하기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며 자책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례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경우도 많습니다. 막말과 무례함이 그 사람의 사회적 미성숙을 반영한다면, 그 사람이 바뀌길 기대하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성숙해지길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가능성인 것입니다. 내가 뭔가 멋진 말을 해서, 혹은 적절히 사회적 규범을 교육시켜 줌으로써 그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노력일까요? 만약 그렇다한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그 에너지를 아껴 나의 상처를 보듬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무례한 막말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찾아오는 순간들을 알아차리고 내려오는것, 다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일일 것입니다.
다른 무언가라면 무엇이든 적어도 그것보다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지금 여기의 현재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머릿속 상상을 가득 메운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순간들 말입니다. 무심코 지나치고 있던 주변의 소리와 물건들, 촉감들, 무언가를 먹고 있다면 그 맛과 향과 온도들, 혹은 지금 나의 호흡의 감각들처럼 노력한다면 주의를 기울여 느껴 볼 수 있는 것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막말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그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막말하는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뭐라고 대꾸해 줘야 코를 납작하게 줄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들은 결국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순간의 그 장소로 나를 도로 데려다 놓을 뿐입니다. 그 인간은 진짜 나를 싫어하나 보나, 인간이 못 되 먹은 것 같아, 그때 그렇게 멍청하게 가만히 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이렇게 반박 할걸, 다음에는 콧방귀를 뀌어 줘야지, 같은 생각들은 결국 무례한 ‘그 사람’을 향한 시선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생각을 움직이는 동력은 ‘나’의 감정입니다. 상처 받은 나의 슬픔과 분노, 자괴감이 상대를 향한 그 생각들을 끌고 갑니다. 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결국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무력감을 마주합니다. 결국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지 내가 100%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력감은 나의 슬픔과 분노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좌절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갈 곳을 잃은 나의 감정은 나를 향해 돌아옵니다. 막말 앞에 무력하고 한심한 나를 향한 자책 말입니다.
무례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함부로 감정을 흩뿌리고 무책임하게 상처를 던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시로 그들에게 상처 받게 되지요.
누군가의 막말로 고통 받고 계신가요? 당신의 그 괴로움에 위로를 건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저는 부디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의 상처에 위로를 건넬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이 무례한 그들의 입이 아닌, 여러분의 상처를 바라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온안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총기 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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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