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근 넷플릭스에서 화제를 모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김서형 배우가 주연한 <종이달>이라는 작품입니다.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은행원으로 재취업하고 한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조용하며 순종적인 주인공 유이화(김서형분)는 우연히 남편 회사 상사 아내의 추천으로 은행에 취직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아르바이트 정도로 시작했던 일이지만 남들이 꺼리는 까다로운 VIP 고객들을 대면 응대하는 일을 자청하고, 특유의 선함과 친절로 고객들의 신뢰를 얻으며 업무성과로 점차 인정받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만나게 된 VIP 고객의 손자 윤민재(이시우 분)을 통해 엄청난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절박하게 돈이 필요하지만 사채업자 할아버지로부터 전혀 지원받지 못하는 민재의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그를 돕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녀 특유의 선의와 이타심, 여기에 민재를 향한 애정의 마음이 더해져 그와의 위험한 외줄 타기 같은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를 이어가기에는 이화가 유부녀라는 사실 외에도 그를 돕는 방법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고객들의 돈을 횡령하는 방식으로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민재의 할아버지가 불의하게 모은 돈을 민재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여기며 민재 조부의 돈에 돈을 대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한번 시작한 횡령은 그 액수와 대상이 점차 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겉보기에는 부족한 것 없어 보이던 이화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의아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내면을 함께 따라가면서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수직적이며 결코 수평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보잘것 없는 배경에 대한 콤플렉스와 이화에 대한 열등감을 그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통해 보상받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경제적 능력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이화를 마치 말 잘 듣는 인형처럼 여기며 성공과 부를 향해 달려가는 야망 넘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부부관계 속에서 이화는 존중받지 못하며, 남편이 자신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듯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는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공허함, 나중에는 남편에 대한 저항과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과정에서 이화는 민재를 지원하며 자신이 누군가에 힘이 되는 존재라는 전능감과 존재 의미를 느낍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횡령이라는 범죄행위와 연결되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이화와 남편 외에도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돈에 대한 다른 가치관과 소비 습관, 삶의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화의 절친한 친구인 류가을(유선 분)은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명품과 신상에 몰두하며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카드빚에 허덕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전 남편과의 이혼 사유가 지나친 소비로 인한 갈등이었을 정도니까요.
이혼 후 양육권을 남편에게 주며 남편의 새 아내와도 쿨한 사이를 유지하는 그녀는 누가 봐도 헐리우드 스타일의 차도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친딸이 자신보다 새엄마와 더 가까운 모습도 기꺼이 인정하며 무엇에든 매달리거나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녀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내면의 공허함이 있습니다. 딸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한 마음을 끊임없는 소비로 채우고, 고가의 선물 공세로 딸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은 일견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반면 이화의 또 다른 친구인 강선희(서영희 분)는 가을과는 정반대 성향의 인물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회사 임원 모임에서 남은 음식을 악착같이 포장해 오고, 가을이 산 신상을 빌려 쓰는 대신 자신이 한 음식을 가져다주며, 아이에게도 남이 버린 명품 옷을 수선해서 입힐 정도로 아끼는 것이 습관입니다. 아끼는 것을 넘어서 너무 궁상맞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죠. 아끼고 모아서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들을 잘 모시는 것이 그녀의 목표입니다.
물론 생활력도 있고, 알뜰하니 좋은 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궁색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남편은 가끔 질린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남편으로서는 그냥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살 수는 없는지,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선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화의 변화 중심에 서 있는 인물, 민재 역시 돈에 대한 관념이 극 초반과 중후반에서 명확히 상반되는 태도를 보입니다. 가난한 학생으로 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던 그가 이화의 전폭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으며 점차 돈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비싼 샴페인이나 룸서비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키고, 20대 초반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즐기는 소박한 술과 안주가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돈을 대하는 자세, 돈의 가치에 대한 믿음, 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그리며 이 작품은 우리에게 돈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돈의 많고 적음,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또는 돈을 모으는 방식, 그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그에 대한 작가의 답이 바로 ‘종이달’이라는 제목에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종이달이라니, 처음 보는 낯선 단어 조합입니다. 하지만 그 뜻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종이로 만든 달, 즉 종이는 돈을, 달은 차올랐다가 또다시 사그라지는, 늘 변하며 완전히 채워졌다고 말할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달처럼 돈은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가 또 멀어집니다. 또, 돈에 대한 욕망 역시 보름달처럼 무한대로 증식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는 생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돈은 우리 삶에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돈이 삶의 가장 우선순위가 될 때는 만족이나 감사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공허함과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죠. 마치 이화가 마지막에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돈으로 인해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기보다는,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이달이라는 작품이 우리에게, 이 사회에 던져주고 싶었던 메시지도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소유의 정도가 행복을 결정짓지 않도록, 내가 지금 누리는 일상 속에서 행복과 감사를 발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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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