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전 남자 친구와의 사랑의 흔적
[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이쁜 사랑을 하고 있는 20대 초반 여대생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전 남자 친구와 최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둘 다 건강한 성인이다 보니 스킨십도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죠.
지금 남자 친구는 제가 첫 애인이라서 그런지, 아직 스킨십이 좀 서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제가 주도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렇게 스킨십을 하다 보니깐 문득, 제가 전 남자 친구와 했던 스킨십 방식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 패턴을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너무 깜짝 놀라서 스킨십을 중간에 멈췄습니다. 지금 남자 친구는 그것 때문인 줄 몰랐겠지만요.
전 남자 친구에 대한 마음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지금 애인이 좋은 것도 확실하고요.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실수할 수 있는 건가요?
A) 이쁜 사랑을 하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이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제가 물어보고 싶은 지경입니다.
대답을 먼저 하자면, 절대 실수가 아니에요.
사람의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서술적 기억과 비 서술적 기억입니다.
서술적 기억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기억이죠.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나, 여행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요. 질문자 분이 전 남자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던 기억이나, 영화를 봤던 기억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죠.
다른 하나는 비 서술적 기억이에요. 자전거 타는 법, 배드민턴 치는 법을 글로 배우는 건 큰 의미가 없죠. 글로 아무리 배워봤자, 직접 몸으로 하는 게 더 빨리 익힐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몸이 기억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비 서술적 기억입니다. 질문자 분이 스킨십을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비 서술적 기억에 해당하는 거예요.
정리를 하면, 전 남자 친구와의 기억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집 앞에서 전 남자 친구와 키스를 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 볼게요.
집 앞에서 키스를 했다는 사실, 당시의 날씨, 전 남자 친구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등은 서술적 기억으로 저장이 돼요.
입술을 움직이는 방법, 혀를 움직이는 방법, 입을 벌리는 정도는 비 서술적 기억에 저장이 되겠죠.
키스를 예로 들었지만, 키스가 문화적인 행동인지 본능적인 행동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요. 그래서 키스를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키스를 시작한 이후에 느껴지는 감각은 대부분 쾌감으로 느껴지고, 그 쾌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서로 노력을 하게 되죠. 그게 위에서 말한 움직임들일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질문자께서 키스 같은 스킨십을 할 때 움직이는 방식은, 과거에 쾌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학습한 결과물이, 스킨십 당시 상황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다시 학습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 당연히 전 남자 친구와의 스킨십 방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실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당연한 거니까요.
스킨십 방식만이 유일한 사랑의 흔적은 아니에요.
과거에 만났던 애인이 나에게 얼마나 신뢰를 줬는지, 나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의견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사랑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이별의 과정은 어땠는지 등 사랑을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서술적 기억과 비서술적 기억으로 남아요.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랑의 흔적이죠.
하지만 스킨십처럼, 비 서술적 기억으로 기억되는 부분은, 우리가 사랑의 흔적이라고 눈치채기 힘들어요. 겉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거든요.
예를 들자면, 뛰는 자세 같은 거죠.
누구나 다 뛸 수 있어요. 하지만 자세는 조금씩 다 달라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뛰는 동작을 흉내내기 시작해서, 자신의 신체 한계에 맞는 편한 방식으로 뛰니까요.
좀 더 잘 뛰고 싶다면, 뛰는 자세를 녹화해서 보고, 자세를 조금씩 반복해서 뛰어서 바꾸는 거예요. 비 서술적 기억을 바꾸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고, 바꾸는 과정도 힘들죠.
사랑도 뛰는 자세를 바꾸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과 이상한 사랑을 하거나, 부모님의 사랑 방식이 독특한 경우에는 다음 사랑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처음 뛰는 방법을 이상하게 배운 셈이거든요.
상대방에게는 내가 정말 이상하게 뛰는 걸로 보이겠죠. 같이 뛰기 힘들 정도로요.
하지만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그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조금씩 사랑도 달라지게 돼요. 정말 다행이죠.
결론은, 열심히 사랑하시고, 또 그 사랑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많이 하세요.
얘기를 하다 보면, 조금씩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차이를 알아가다 보면 나만의 사랑을, 또 지금 애인과의 스킨십 방법을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