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괜찮습니다 11화 봄은 좋지만...

2026-03-28     심경선 기자

 

11. 봄은 좋지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의 단점도 늘 붙어 다닌다. 많은 식물과 함께 살고 있으니 필연적으로 날씨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봄기운이 느껴질 때 부터 완연한 봄이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을 ‘식물 대 이동’에 공들인다. 겨우내 실내로 꽁꽁 싸매고 들어와 있는 식물들을 하나 둘 순서를 정해주며 발코니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대 이동’의 대부분이다. 언제부터 인지 식물을 양지로 내보내는 기준일이 식목일이 기준이 되었다. 괜히 식목일이 지나면 어느 새 밤 공기도 춥기만 하지는 않다는 느낌이 든다. 봄에는 식물을 마냥 그저 밖에 내놓았다가는 봉변을 당한다. 겨울동안 실내에서도 그 척박한 환경을 견디고 화분을 가득 채워 자라기 때문이다. 식물 대 이동에 곁들여지는 분갈이, 이 것이 또 문제다.

 

분갈이.

분갈이는 말을 그대로 풀어 이해하면 된다. 이미 심어져 있던 화’분’을 비슷하거나 한 단계 더 큰 화분으로 ‘갈아’주는 일을 말한다. 활동성이 좋은 식물들은 이미 화분을 삼키듯이 뿌리가 가득 차있다. 식물 키우는 사람들은 이 때 모습을 보고 ‘흙을 다 삼켰다’라고 표현하는데, 지난 분갈이 때 잔뜩 흙에 묻어 심었는데, 화분에 가득찬 모습은 가히 신비할 정도로 뿌리만 가득하다. 흙이 없다. 그 많은 흙은 도대체 다 어디 갔을까. (물을 줄 때 마다 조금씩 흘러나가거나 뿌리가 밀어내서 유실된다)

 

홑겹의 반팔을 입기 전까지, 이제 낮에는 얇은 외투 한 장도 고민 될 정도로 푸근해 졌다. 분갈이를 외치는 식물의 요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식물도 분갈이도 너무너무 신나고 재밌지만 회피성 인간인 나는, 분갈이 할 때 앉는 의자에 들어 앉을 때 까지 미뤄도 너무 미룬다. 꽤나 무거운 화분을 양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땀이 살짝 이마를 적실 때에도 미루고 미룬다. 얼핏 생각하면 분갈이를 미루는 것 같지만 나의 전체적인 행동을 보면 이건 분명 봄이 왔다는 것을 외면하는 행위이다. 목 감기 방지용 봄 스카프를 자꾸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정작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든지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계절 중 봄은 괜히 낙관론자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붙여보면 겨울은 비관론자, 여름은 분노유발자, 가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고민에 빠진 자. 이렇게 말을 붙여 놓고 나를 대입해 생각해 본다면, 나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길목을 참 좋아한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어둠과 외로움과 슬픔과 비난과 시련 같은 것들에 어디 한 군데 닿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내 마음에 새로운 정보가 입력됐는데, 봄 말이다. 낙관론자 봄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더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짧은 계절이 가진 힘에 대해서 말이다. 기간으로 치면 바짝 정신차리고 있어야 꽃을 챙겨볼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엄청난 힘이 실려 있다. 다 죽어가던 식물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려내기도 일쑤고 다 죽어가던 사람의 눈물을 마르게 하는 데에도 큰 힘을 부린다. 내게 봄은 주로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셈이다.

 

어찌됐든 인생의 결말은 낙관론자들의 승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냥 낙관론자 보다는 내면은 단단하고 외면은 다정한, 선택적 낙관론자들의 승리를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지금도 그 무엇의 선택 앞에서 망설이기부터 하는 내게 ‘낙관’이라는 단어를 획득하기 까지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래도 당장 내가 이 세상에 살아 붙어있기로 하는 한, 시간은 내 곁에 있다. 시간의 연속성은 그 얼마나 다부지고 여지 없이 흐르는가. 어쩌다 한 번쯤, 그러다가 종종, 또 그러다가 마침내 내 곁에도 낙관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정말 긍정의, 낙관의, 마법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