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과 뇌, 정서와 기억의 회복
정신의학신문 ㅣ 광화문숲 수면센터(수면클리닉)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떠셨나요? 푹 자서 개운하다고 느끼셨을 수도, 혹은 잠이 오지 않아서 밤새 뒤척이다 전날의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찜찜한 기분으로 일어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잠은 활동하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잠이 부족하거나 수면 질이 떨어지면 피로감이나 집중력 저하 같은 증상과 함께 비만, 고혈압, 당뇨 같은 질병 위험성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면은 불안, 우울, 기억력, 주의집중과 같은 다양한 정서적, 인지적 측면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여러 가지 걱정들로 쉽게 잠이 들지 못하거나 잠이 든 후에도 자주 깬다든지,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새벽녘부터 잠이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을 흔히 경험합니다. 또, 반대로 의욕이 없어지고 기력이 저하되면서 평소보다 과하게 자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면은 다양한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증상들과 관련 있고, 수면의 양과 질은 우리의 신체, 정신 건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수면은 크게 렘(REM: Rapid Eye Movement)과 비렘(NREM)수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렘수면에서는 빠른 안구 운동과 함께 뇌가 활성화되는 반면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꿈을 꾸기도 합니다. 비렘수면에서는 반대로 몸은 움직일 수 있지만 뇌활동은 비활성화됩니다. 비렘수면은 흔히 깊은 수면이라고 불리며, 대뇌 피질에서 1Hz 정도의 느린 뇌파가 뇌 전반으로 흐르는 서파 수면(slow-wave sleep)이 나타납니다. 비렘 수면은 1~2단계의 앝은 수면과 서파 수면을 보이는 3~4단계의 깊은 수면으로 다시 나뉘어 총 4단계로 분류됩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렘과 비렘수면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비렘 수면이 전체 수면의 75~80%를, 나머지 25~20%를 렘수면이 차지합니다. 비렘 수면 동안은 신체적인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렘수면 동안에는 기억과 정서 같은 정신적 통합과 심리적 재생이 주로 이루어집니다. 매일 밤 보통 90~120분 주기로 1~4단계의 비렘 수면과 렘수면을 반복하며 수면을 취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몸의 피로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활동 시간 동안 받아들인 다양한 정보와 사건, 정서를 처리하고 편집, 저장, 기억, 통합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무수히 많은 자극과 정보, 다양한 대상과 사건, 기억과 정서 중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남길지, 마치 방송국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 때 종일 촬영을 하고 난 후 긴 원본 동영상을 중요한 부분 위주로 적당한 분량으로 편집해서 최종본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수면을 통해 이렇게 편집과 재처리, 저장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기억과 정서를 통합하고 필요한 것들을 보관합니다. 이는 기억력과 정서적 전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다양한 선행연구를 통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기억력이 감소하고, 반대로 잠을 잘 자고 난 후에는 기억력과 문제해결능력이 향상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위스콘신 대학 연구팀에서는 쥐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숙면을 취한 쥐가 깨어있던 쥐에 비해 시냅스 크기가 18% 더 작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뇌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정보를 판단하여 시냅스 가지치기(prune)한 결과로, 수면이 뇌를 재설정하고 효율을 높여 새로운 정보를 기억 및 통합하도록 도움 준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기법 중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EMDR: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 Reprocessing)’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법에서는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안구운동 또는 소리, 두드리기 같은 좌우 양측성 자극을 통해 외상 기억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정서나 사고, 이미지, 신체감각 등을 둔감화하고 기억을 재처리하도록 돕습니다. 여기에서 안구운동을 통한 기억의 활성화와 재처리는 렘수면 단계에서의 급속 안구운동과 유사점을 가집니다.
깊은 수면과 렘수면을 하는 동안 뇌에서 정서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더 각인시키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흐릿해지면서 기억이 재구조화됩니다. 아울러 활동 시간에는 미처 의미가 다 파악되지 못했던 일들도 수면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고 더 넓은 기억체계 속으로 통합, 연결됩니다. 특히 렘수면 동안에는 서로 동떨어지거나 거리가 먼 것 같은 정보들이 연결되면서 기억의 처리가 일어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의 경우 충격적이고 강렬한 외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연결, 통합되지 못하며 파편화되거나 해리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꿈을 통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감정들로 인해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런데 EMDR을 통해 REM 수면 동안 나타나는 기억과 정서의 처리, 통합, 연결과 유사한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트라우마의 기억이 재구성되고 치유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EMDR이 정확하게 어떤 기전으로 트라우마 치유에 도움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EMDR과 REM 수면이 가지는 유사성을 통해 우리는 수면이 갖는 기억과 정서적 회복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성실과 근면함이 강조되면서 잠을 많이 자는 것이 게으름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했죠. 하지만 많은 뇌과학 연구들에서는 수면이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 시간과 함께 양질의 수면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입니다.
혹시 만성적인 수면 부족이나 낮은 수면의 질로 고민하고 계시다면, 운동, 카페인 섭취 줄이기, 적절한 수면 환경 만들기, 일정한 수면 시간 지키기 같은 건강한 습관을 만들어 실천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수면장애로 오랜 시간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라면 수면클리닉 등을 통해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통해 꿀잠 주무시고, 개운한 몸과 마음, 맑은 기억력과 밝은 기분으로 매일을 시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수면센터(수면클리닉)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