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맞는 여성 증후군 -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남기는 상처

2025-11-14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우리가 가정폭력이나 친밀한 관계 속의 폭력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 “왜 맞으면서도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할까?”라는 의문을 품곤 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를 끊고 떠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가해자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심리학적 개념이 바로 ‘매 맞는 여성 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입니다.

 이 용어는 1970년대 심리학자 레노어 워커(Lenore Walker)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이 증후군은 오랜 기간 친밀한 파트너로부터 반복적으로 신체적, 심리적,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들이 겪는 독특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군을 말합니다. 학대 상황에 장기간 노출되면 신체적 상처만 아니라 자존감, 감정 조절 능력, 심지어 현실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까지 크게 변하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증후군이 단순히 한 개인의 성격적 문제나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은 폭력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굴레와 학습된 무기력 이 그 기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폭력의 주기와 맞물리면서 반복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폭력의 주기>

1. 긴장 조성기 : 사소한 말다툼이나 불만으로 시작되어 긴장감이 고조되는 시기입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기분을 맞추려 애쓰고, 자기 행동을 검열하며 ‘내가 더 조심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는 폭력적인 행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언어적 비난이나 위협 등 간접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폭발기 : 고조된 긴장감이 결국 폭력으로 폭발하는 시기입니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적, 경제적 폭력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피해자가 엄청난 공포와 함께 무력감을 느낍니다.

3. 화해기/밀월기 : 폭력 후 가해자가 깊이 반성하고 사과하며, 다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와 같은 말로 용서를 구하고, 선물 공세를 하거나 평소와 다른 따뜻한 태도를 보입니다. 피해자는 이 시기에 가해자가 다시 예전의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믿으며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결국 다시 긴장 조성기로 돌아가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폭력의 주기는 피해자의 마음을 교묘하게 지배합니다. 특히 화해기, 즉 밀월기의 ‘사랑’은 피해자로 하여금 ‘그래도 저 사람에게는 여전히 좋은 면이 있어’, ‘이번만큼은 정말 달라질 거야’라고 믿게 만드는 강력한 덫이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는 자신의 판단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을 비난하며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폭력이 반복되는 관계를 볼 때면, 많은 분이 ‘그냥 헤어지면 되는 것 아니냐’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을 겪는 이들이 폭력적인 관계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데에는 복합적인 심리·사회적 요인들이 작용합니다.

• 학습된 무기력 : 반복적인 폭력 상황 속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믿게 됩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현실에 순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지속적인 폭력은 피해자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공포와 불안, 불면증, 우울증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을 겪으며 정상적인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집니다.

• 낮아진 자존감과 자기 비난 : 폭력적인 관계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가해자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당합니다. ‘네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며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 사회적 고립 : 가해자는 피해자를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피해자는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어지며, 결국 가해자에게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 경제적 의존성 및 자녀 문제 :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거나, 자녀를 홀로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듯, 피해자가 가해자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만들어낸 심리적·사회적 덫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자를 비난하기보다, 그 상황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피해자 자신이 “이 상황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피해자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셋째, 전문적인 지원 체계와 연결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상담, 심리치료, 법률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기관을 통하여 도움을 받고, 반복된 폭력에서 벗어나 물리적·심리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점이 됩니다.

• 여성긴급전화: 1366

• 여성폭력사이버상담: https://women1366.kr/?menuno=222

 

당산한결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황성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