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숨겨진 아픔 - 소방관 트라우마

2025-11-13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우리 사회에서 소방관은 재난과 위험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는 영웅으로 인식됩니다. 불길 속에서 생명을 구하고, 사고 현장에서 구조를 이끌어내는 이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우리는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 영웅적인 모습 뒤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은 상처와 아픔이 존재합니다. 최근 전해진 소방관의 자살 소식이나, 현장에서의 심리적 충격으로 고통받는 소방관들의 이야기는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소방관들이 직업적으로 마주하는 상황은 일반인이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만큼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형 화재, 교통사고, 참사 현장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때로는 너무도 참혹하여, 그 순간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타인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구조 과정에서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경험하는 순간은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비롯한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유발합니다. 불면증, 악몽, 불안, 우울증, 그리고 심한 경우 알코올 의존이나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적 상처가 보이지 않는 상처라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일상적인 업무도 무난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끔찍했던 장면이 불쑥 떠오르거나, 자꾸만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때로는 술이나 과로로 그 불안을 억누르려 애쓰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위험까지도 생기게 됩니다.

 소방관들은 현장에서의 극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을 요구받습니다.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와 조직 내 분위기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마음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직업적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비칠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결국 곪아가는 마음의 상처를 혼자 감당하려다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소방청과 각 소방서에서도 이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필요한 치료를 받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의무적인 심리 지원 시스템 구축을 통해 소방관들의 심리적 어려움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도 신체적 부상만큼 중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실질적이고, 접근성 높은 심리 지원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소방관들의 심리상담을 전담하는 전문 상담 인력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합니다. 소방 현장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들이 겪는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소방관들의 트라우마가 전문적인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인식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소방관들이 우리 사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인식하고, 이들의 아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소방관들의 헌신과 희생은 우리 사회의 안전과 직결됩니다. 그들의 마음이 건강해야 우리 모두의 안전 또한 지켜질 수 있습니다. 재난 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소방관들을 향해 우리가 보내는 박수와 환호는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소중한 격려입니다. 하지만 소방관들이 현장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조용히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관심과 실질적인 지원이 더 절실합니다.

 우리 사회가 소방관들의 숨겨진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변화를 시작하고, 그 노력이 지속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영웅들의 멋지고 든든한 모습만 아니라, 그 이면의 심리적 아픔과 어려움까지 보듬어주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