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가해와 피해의 지속, 가정폭력

2025-10-27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러스트_freepik

 가정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로서 우리는 가정을 통해 정서적, 신체적 안식과 회복을 경험하고 경제적 공동체로서 생활합니다. 이렇듯 가정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곳이며, 삶을 지속하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할 가정에서 가장 큰 폭력과 상처를 경험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바로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입니다.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정신적,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서 크게 신체적 학대심리·정서적 학대, 경제적 학대, 성적 학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체적 학대는 잡거나 밀치는 행위, 발로 차거나 때리는 행위를 비롯한 폭행이나 감금, 신체적인 억압을 의미하며 정서적 폭력은 언어학대나 무시, 가족 구성원에 대한 구속이나 제약,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인간관계를 통제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경제적 폭력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필요한 생활비를 제공하지 않는 것, 성적학대는 부부강간이나 자녀에 대한 성폭력,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렇게 가정폭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 역시 생각보다 많습니다.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22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남녀 9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지난 1년간 배우자나 파트너로부터 4가지 가정폭력 유형 중 하나라도 경험한 비율이 7.6%(여성 9.4%, 남성 5.8%)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폭력의 첫 피해 시기는 ‘결혼이나 동거 후 5년 이후’가 여성은 37.4%, 남성은 57.3%로 남녀 모두 가장 높은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이나 동거 후 1년 이상 5년 미만’이 그다음으로 높게 나왔습니다. 또, 폭력이 발생한 후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라는 응답이 53.3%로 나타나 전년 대비 증가한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가정폭력이 혼인이나 동거와 같은 가정구성의 비교적 초기 단계부터 많이 발생하며, 그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또, 처음 폭력이 발생한 후 그에 대한 반응이나 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적극적인 대처의 부재, 폭력에 대한 암묵적인 용인이 폭력의 지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비교적 심각하지 않기에 큰일이 아니라고 여기거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인지하더라도 배우자나 파트너이기 때문에, 혹은 내 자녀의 부모라는 이유로, 또 상대방이 일시적으로 화가 나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므로 그 순간만 잘 넘기면 된다고 생각해서 참는 경우가 많습니다. 폭력을 행사할 때는 화가 난 맹수처럼 달려들다가도, 그때가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애정을 표현하며 용서를 비는 상대방의 모습에 폭력 역시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기거나, 마음이 약해져 쉽게 용서하기도 합니다.

 주디스 허먼은 저서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를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공포-단절-속박’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들은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공포를 경험하며,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 외부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건강한 애착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유일한 관계의 대상이자 세상이 되고, 피해자의 사고체계는 변형되고 외부와의 연결은 차단됩니다. 계속되는 폭력은 피해자에게 통제감의 상실, 연결감의 부재, 사회 안에서의 보살핌과 돌봄 기회의 박탈을 야기합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며, 속박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끊임없이 만나면서 피해자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로서, 피해자의 신념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허먼의 이런 분석은 가정폭력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메커니즘을 잘 설명하며, 피해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쉽게 “그렇게 폭력을 당하면서 왜 참고만 사느냐”, “왜 바보같이 계속 용서해주느냐.”라며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가해자에 의한 심리적 지배, 의존성, 고립되고 단절된 환경으로 인한 도움 요청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 내의 일’ 또는 ‘부부간의 일’로 여겨지며 침범할 수 없는 사적 영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거나 도움을 청하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이런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술한 여성가족부의 조사에서 ‘가정폭력은 가정 안에서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 비율이 75.9%, ‘이웃의 부부간 폭력을 목격하면 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응답이 87.9%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정폭력의 심각성과 사회적 개입, 주변의 지지와 도움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깝고 안전을 제공해야 할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배우자나 부모이기 때문에,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내가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냥 넘어가면 그것이 더 큰 폭력으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폭력이 발생했을 때는 절대 그냥 넘기지 말고 친지나 친구, 이웃 등 주변에 알리고 필요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경찰서나 상담 기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에 신고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진단기록과 촬영물을 남기는 것도 이후에 폭력의 증거를 입증하고 법적 절차를 밟을 때 도움이 됩니다. 비상시를 대비해 상담소나 보호소의 연락처를 미리 알아놓고 신분증과 비상금, 의료보험카드나 진단서, 옷 등을 미리 준비해놓거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나 친척집에 보관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 나나 우리 가정이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있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관심을 갖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변에서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정황이 있거나 이를 알게 되더라도 괜히 남의 일에 나섰다가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닌지, 보복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로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8조 1항에 의거하여 수사를 담당하는 사법경찰관리는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수 없는 비밀엄수 의무가 있고, 따라서 신고자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보복에 대한 염려가 든다면 경찰에 비밀엄수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가정폭력은 더 이상 가족 구성원 사이의 사적 영역으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가정폭력은 그 특성상 폭력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고 피해자에게 지우기 힘든 몸과 영혼의 상흔을 남깁니다. 또, 폭력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폭력을 목격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도 정신적 충격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 부채감을 남깁니다. 이런 감정들은 매우 복합적이며 때로는 양가적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안쓰러움, 죄책감과 함께 왜 자신을 그런 상황 속에 계속 있도록 했는지, 왜 그런 가정을 계속 유지했는지 하는 원망을 동시에 느끼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구성원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오랫동안 누적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해자를 해치기도 하고, 대를 이어 폭력이 이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정폭력은 오랜 시간, 많은 가족 구성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폭력의 양상이 나타난다면 즉각적으로 적절한 대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 주변에서 혹시 가정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은지 늘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되고 지속되는 폭력의 고리와 악순환을 끊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쏟아야겠습니다.

 

당산한결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황성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