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구조를 드러내는 말들 - 우울의 언어를 이해하기

2025-09-12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러스트_freepik

 

“부담이 될까봐 말 안 했어.”

“나 없이 다들 더 편할 거야.”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고.”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한 환자분들에게 자주 듣는 말입니다. 언뜻 보기엔 자기방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말들에는 깊고 무거운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놓칠 수 있는 우울증의 단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가볍게 지나칩니다. 그러나 언어는 그 사람의 마음 구조와 정서 상태를 드러냅니다. 최근에는 AI와 언어 분석 기술이 우울과 자살 위험을 감지하는 도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언어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 박사는 언어와 심리 상태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 정신 건강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페니베이커 박사는 1990년대 중반, 컴퓨터 기반 언어 분석 도구인 LIWC (Linguistic Inquiry and Word Count)를 개발했습니다. 이 도구는 사람들이 쓴 텍스트에서 심리적 신호를 분석합니다. 언어를 통해 사람의 정서 상태, 성격, 심리적 회복력, 심지어 신체 질병의 회복 가능성까지 예측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기능어 사용 빈도 (I, you, we, the, and, but 등), 감정 단어 사용 빈도 (슬픔, 기쁨, 분노 관련 단어 등), 인지/사고 단어 사용 빈도 (이해하다, 믿다, 생각하다 등), 시간 단어 사용 빈도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 등) 등이 모두 우리의 정신건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울 증상이 있는 사람은 ‘나(I)’ ‘내가’ 같은 1인칭 단수 대명사 사용이 많고,‘우리는(we)’ ‘함께(together)’ 같은 사회적 언어는 적습니다. 이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고립감, 내면화된 고통의 반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상담실에서 자주 듣는 말들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담이 될까봐 말 안 했어.”

 표면적으로는 타인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정서적 고립감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 침묵을 선택했다’는 양가적인 심리 상태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나 없어도 잘 살잖아.”

 이 말은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 즉 ‘나는 없어도 아무 영향이 없다’는 소외감을 반영합니다. 겉으로는 무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소멸 욕구와 함께,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절망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냥 문제야.”

 이러한 표현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깊은 자기혐오를 드러냅니다. ‘내가 모든 일의 원인이다’라는 왜곡된 책임감, 자기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해가 된다고 믿는 위험한 인지 패턴이 자리 잡고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진단 기준을 모두 충족하지 않더라도 우울의 전조 증상일 수 있으므로 무시하거나 논리적으로 반박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안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다가가야 합니다.

사진_freepik

 

 우울은 삶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세상과의 연결이 느슨해지는 과정입니다. 그 연결의 끈을 다시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말’ 속에 있습니다. 요즘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말,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말할 수 없음'의 절망이 들어 있고, 그것을 ‘말이 되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울의 언어에 귀 기울여보세요. 우리 주변에서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더 빨리 발견하고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요.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