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깝게-노년기 부모와 성인 자녀의 건강한 가족관계

2025-08-11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때로 너무 가깝거나, 혹은 너무 멀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시간이 흘러 부모는 노년기에 접어들고 자녀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미묘하고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자식이니까’라는 말 속에는 무언의 기대와 책임, 그리고 때로는 침범과 오해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건강한 거리두기’‘심리적 경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족관계에서 쉽게 간과하곤 하는 점은, 가깝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 역시 적당한 간격이 필요합니다. 이는 정서적 독립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헌신했지만, 성인이 된 자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독립된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 역시 자녀와는 다른 고유한 세계와 욕구를 지닌 존재이지요. 이러한 인식은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됩니다.

 가령, 너무 자주 연락하거나 방문하면 처음에는 반가울지 몰라도 점차 부담되기 쉽습니다. 매주 일요일마다 가족 모임을 갖는 전통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제한하는 의무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조금 덜 보는 것’이 더 깊은 애정을 유지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간헐적인 만남 속에서 오히려 더 진솔한 대화가 오가고, 기다림이 관계에 온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적절한 심리적 경계(boundary)’는 관계 만족도와 정서적 안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경계란 서로에 대한 책임과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일방적인 희생이나 침해를 막고 상호 존중을 가능케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려 하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려 할 때 관계는 쉽게 뒤틀리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들이 건강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경제적인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식사 모임을 할 때 한쪽이 계속 비용을 부담하게 되면 관계 속에 미묘한 위계나 의무감이 자리 잡게 됩니다. 번갈아 가며 비용을 부담하거나,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각자 조금씩 나누는 방식은 오히려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의 일상과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기보다는 ‘물어봐 주고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녀의 직장생활이나 결혼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조언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일 수 있지만, 동시에 통제와 간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건강이나 생활에 대해 자녀가 모든 걸 해결하려 하거나, 부모의 삶을 ‘관리’하려는 태도도 피해야 합니다. 성인 대 성인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도와줄 준비는 되어 있지만, 요청이 있을 때만 다가가는 존중’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국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기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자녀는 부모가 나름의 방식으로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관계는 훨씬 더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불안과 걱정이 서로를 통제하게 만들기보다는, 믿음이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감정언어’를 사용하는 연습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항상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정을 말하지 않고도 알아주길 기대하고,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과 서운함이 쌓이기 마련이지요. “나는 네가 그때 그렇게 말해서 서운했어”, “요즘 너랑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조금 외로웠어”처럼 자신의 감정을 주어로 시작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은 오해를 줄이고 친밀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건강한 가족관계는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며, 가까우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관계의 기술을 익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욱 깊어지지만, 그만큼 관계도 섬세하게 다뤄야 합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과 배려가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도록 말이지요. 여러분의 가족관계가 그런 건강한 균형을 바탕으로 더욱 견고하고 따뜻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이호선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