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취약 요소
정신의학신문 ㅣ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망가진 생체시계와 우울증
우리 뇌는 고유의 생체시계 리듬에 따라 기능합니다. 하루의 수면과 각성 주기는 생체시계라고 불리는 뇌 구조에 의해 정밀하게 조절됩니다. 그러나 기분장애를 겪는 경우, 이 생체시계의 리듬이 종종 교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그러진 생체시계는 단순히 수면 문제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 증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망가진 생체시계를 바로잡는 것은 기분장애 치료 및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아침에 햇빛을 충분히 쬐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동안 햇빛을 받을 수 있는 밝은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생체시계 정상화에 도움이 됩니다.
생체시계의 부조화는 계절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증가시키기도 합니다. 생체시계가 제대로 조절되지 않으면 수면 리듬과 활동성이 계절의 영향을 받기 쉬워집니다. 유전적으로 일조 시간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계절성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더 높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겨울철에도 멜라토닌 분비 시간이 여름철과 유사하게 유지되지만, 계절성 우울증 환자는 겨울철 밤이 길어짐에 따라 멜라토닌 분비 시간도 함께 늘어나는 특징을 보입니다. 또한, 수면 리듬이 자주 깨지는 사람은 우울증 발병률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생체 리듬이 빨라져 충분히 자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면, 계절성 우울증 환자의 경우에는 수면 리듬이 늦어져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하며, 그 결과 수면 장애, 만성 피로, 활력 저하 등을 겪게 됩니다.
수면의 질적인 변화 또한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깊은 수면 단계인 서파수면이 감소하고, 얕은 수면 단계인 렘수면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서파수면은 뇌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서파수면의 감소는 신경세포 손상 누적 및 신경전달물질 고갈과 이어져 우울증의 핵심적인 병태생리 기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수면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건강한 뇌 기능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수면 부족이 지속되면 뇌의 해마 영역에서 세포 분열과 새로운 신경 세포 생성 과정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분장애의 초기 증상 중 하나가 수면 장애인 경우가 많으며, 만성적인 수면 부족은 신경 생성 저하 및 기능 저하라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규칙적인 생체 리듬을 유지하는 것은 새로운 신경 세포를 생성하고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어서 우울증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취약 요소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성별, 성격 등 다양한 요인이 우울증 발병 위험을 높일 수 있으며, 이러한 취약성을 이해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울증의 취약 요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 두 배 정도 높은 우울증 발병률을 보입니다. 특히 사춘기부터 갱년기에 이르는 생산연령기의 여성들이 우울증에 더 취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여성 호르몬이 기분과 의욕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우울증을 포함한 기분장애 발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 호르몬 수치가 급격하게 변동하는 시기인 출산 직후와 폐경을 맞이하는 갱년기에 여성들은 정서적 불안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물론 남성 또한 남성 호르몬 분비가 감소하는 중장년기에 우울증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한 성격 유형 또한 우울증 발병 위험을 높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멜랑콜리 친화형 성격’이라고 불리는 유형은 꼼꼼하고 질서와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적 특징은 사회생활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완벽주의적 성향, 융통성 부족, 그리고 이분법적 사고에 쉽게 빠지는 경향 때문에 우울증에 더 취약할 수 있습니다. 강박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경계성, 자기애성, 회피성 성격 유형 또한 우울증 발병 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 유형의 경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규칙과 책임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완화하며, 융통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나친 집착과 노력은 심리적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정신적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희로애락의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과잉 반응이나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트레스 반응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경보 시스템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각 여부와 관계없이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 axis)이 활성화되어 ‘투쟁-도피 반응’과 관련된 교감신경계의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이는 신체가 일종의 ‘전투 상태’에 돌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싸우거나 도망갈 준비를 위해 뇌는 각성 및 흥분 상태가 되고, 근육으로 혈액이 공급되며,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말초 혈관이 수축하여 혈액이 중요한 부위로 집중됩니다. 이러한 생리적 반응은 본래 우리 몸의 적응력을 높이는 중요한 메커니즘이지만, 만약 이러한 과정이 과도하게 반복되거나 지속되면 오히려 파괴적인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고혈압이나 심장병과 같은 신체 질환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울증은 스트레스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잉 반응을 쉽게 일으키는 성향은 유전적 요인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될 수 있지만, 스트레스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동일한 상황에서도 스트레스의 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며, 파괴적인 결과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유전적으로 불리한 요인을 가지고 있거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며, 때로는 완전히 정반대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개인의 성격, 심리사회적 특성, 그리고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크게 좌우됩니다.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나아가 우울증 발병 위험도 성격에 따라 달라지므로, 각 성격 유형에 맞는 맞춤형 대처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트레스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저변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위의 현실과 자신이 기대하는 바의 괴리가 클수록 스트레스는 심해집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거나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 때, 혹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낄 때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대치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모두 스트레스 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부합하는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비결입니다. 만약 지속적인 우울감이나 스트레스 관리의 어려움을 느낀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상담을 통해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전형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