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박증, 회피하면 할 수록 더 심해진다고..
정신의학신문 ㅣ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 글은 강박증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의학적·심리적 진단이나 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정신건강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앞선 글들에서 강박증(OCD, Obsessive-Compulsive Disorder)의 기본 개념과, 강박 사고와 강박 행동이 불안을 어떻게 악순환으로 몰고 가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강박 사고(Obsessions)로 인해 발생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강박 행동(Compulsions)을 반복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 불안을 더욱 강화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주요한 포인트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악순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핵심 기제 중 하나인 ‘회피(avoidance)’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왜 이것이 강박증을 유지·악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두려움을 회피하는 미묘한 행동들
대개 강박증을 논할 때에는 확인이나 의식 등 눈에 보이는 반복 행동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차례 문단속을 하거나, 손을 과도하게 씻는 모습 등을 강박 행동의 전형으로 생각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강박증에는 보다 은밀하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불안을 관리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이나 상황을 피하는 회피 전략입니다(Olatunji, Davis, Powers, & Smits, 2013). 예컨대 밖에서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거나, 특정 장소에 가는 일을 계속 미루는 식으로 부딪힐 위험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지요. 물론 강박 행동 또한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회피 전략에 속합니다.
처음에는 회피가 매우 매력적인 방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한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그만큼 힘든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염 강박이 있으신 분이 특정 화장실은 위험하다고 느끼면, 아예 그 공간 자체를 멀리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장의 불안은 일시적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가 누적될수록 “그 대상은 정말로 위험하기 때문에 내가 피하는 것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강력해집니다(Hezel & McNally, 2016). 실제로 부딪혀 보지 않고 피하기만 했기 때문에, 그 대상이 예상만큼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전혀 학습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피하면 피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강박증의 역설
나아가 회피는 범위가 점차 확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는 특정 물건을 피하는 정도였더라도, 그 물건이 있는 장소 전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결국 그 장소와 연관된 다양한 활동까지 기피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Doron & Kyrios, 2015). 예를 들어 공중화장실이 두려워서 그 근처 건물 자체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그 건물이 있는 지역 전체에 발도 들이지 못하는 식으로 상황이 번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경험을 스스로 제한하게 되며, 심할 경우 대인관계나 직장·학교생활까지 축소되어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회피 전략을 지속하시면, 두려움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집니다. 기존의 글에서 언급해 드렸듯이, 강박증 치료의 핵심은 “두려워했던 상황에서 예상한 재앙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시는 데 있습니다(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예컨대 노출 및 반응 방지(Exposure and Response Prevention, ERP) 기법을 통해 두려운 상황에 직접 노출되어 보고, 그 불안을 낮추는 강박 행동(세척, 확인 등)을 일시적으로 하지 않은 채 충분한 시간을 보내보면, “내가 예상했던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새로운 학습이 일어납니다(Olatunji et al., 2013). 이 과정을 통해, 강박 사고가 제공하는 위협 정보가 실제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체득하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해당 상황을 아예 피하시면, 이 소중한 학습 기회가 사라지고 맙니다.
단기적 안도감, 증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더욱이 회피는 “단기적 안도감”을 빠르게 주기 때문에 강화되기 쉽습니다. 회피를 통해 두려운 상황을 피하시면, 순간에는 “이제는 불안하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 순간의 안도감이 보상처럼 작동해 그 행동을 더욱 반복하게 만듭니다(Hezel & McNally, 2016). 즉, “안 가면 편하구나”라는 학습이 심화되는 만큼,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감지되는 상황은 모두 “가지 않는” 쪽으로 선택이 굳어지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회피 범위가 커지면서, 개인의 삶은 두려움을 피해 다니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게 되고, 가치 있는 활동이나 인간관계에 투자할 기회는 급격히 줄어듭니다(Olatunji et al., 2013).
이러한 회피가 강박증을 악화시킨다는 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더 위험합니다. 확인이나 세척처럼 외부에서 누가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행동과 달리, 회피는 “안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비가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강박 행동이 별로 없다고 여기면서도, 실은 피하는 대상이나 상황이 상당히 많을 수 있습니다(Doron & Kyrios, 2015). 예컨대 어떤 이는는 “손을 자주 씻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밖에서 뭔가를 만지지 않는 방식으로 생활 반경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는 식입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나?” 강박증 치료를 위한 첫 걸음
회피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내가 어떤 것을 두려워해서, 무엇을 피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야 합니다. 그리고 “이걸 피함으로써 얻는 단기적 안도감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장기적으로 잃게 되는 기회나 경험은 무엇인지”를 함께 정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밥을 먹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모임을 거절한다. 그러면 당장 편하긴 하지만, 결국 친구들과의 관계도 단절되고 바깥활동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식으로, 단기적 이득과 장기적 손해를 비교해보는 것이지요. 이 과정을 거치면, 스스로도 “회피가 결국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좀먹고 있구나”를 보다 분명하게 자각하실 수 있게 됩니다.
수용전념치료(ACT) 또한 이러한 경험적 회피(Experiential Avoidance)를 주요 개념으로 다룹니다(Hayes, Strosahl, & Wilson, 2012). ACT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려 애쓰는 대신,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나 활동에 전념하도록 권합니다. 강박증 환자분들이 회피를 택하는 이유가 “불안한 감정을 느끼기 싫어서”라면, ACT에서는 “어느 정도 불안이 있더라도, 내가 정말 중요한 가치나 목적이 있는 활동을 실천해보겠다”는 모드를 구축하도록 돕는 것이지요. 이는 “무조건 불안을 없애겠다”는 발상과 달리, “불안이 있음을 인정하고도 움직여보겠다”는 태도로 전환하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정리하자면, 회피란 단기적으로는 강박 사고로 인한 불안을 덜어주는 듯하지만, 그 대가로 “두려움을 실제로 해소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함으로써 강박증을 유지시키는 행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강박 의식만큼이나 영향력이 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만큼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치료 전 단계에서 “나는 특별히 강박 행동이 없는데도 불안이 심하다”고 느끼시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다방면에서 이미 회피 전략을 쓰고 계신 사례가 흔히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박증을 극복하실 때 “어떤 것을, 언제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를 꼼꼼히 점검하고, 조금씩이라도 피하지 않고 시도해보는 일이 필수적입니다(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앞서 언급했던 강박 사고와 행동 사이의 악순환은, 결국 회피 같은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러므로 회피를 줄여보는 용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회피를 포기하면 당연히 처음에는 더 큰 불안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회피를 중단하고 노출을 선택해보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무작정 큰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아주 작은 단계라도 두려움을 기꺼이 감수해볼 때, 강박증이 부풀려놓은 불안을 조금씩 해체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처음에는 힘들지만, 해보면 생각보다 ‘재앙’이 일어나지 않음을 직접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이 자율성 회복의 강력한 토대가 됩니다. 결국, 강박증이라는 복잡한 괴물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반복 행동만큼이나 은밀히 작동하는 ‘회피’를 파악하고, 이를 인지하고 대처하는 노력이 이뤄져야 합니다.
강박증의 치료란, 결국 치료의 틀 안에서, 치료자와 함께 회피를 직면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신재현 원장
참고 문헌
Abramowitz, J. S., McKay, D., & Storch, E. A. (2021). The Wiley Handbook of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s. Chichester, UK: John Wiley & Sons.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 Washington, DC: Author.
Doron, G., & Kyrios, M. (2015). Obsessive-compulsive disorder: A review of possible specific internal representations within a broader cognitive theory. Clinical Psychology Review, 39, 1–14.
Hayes, S. C., Strosahl, K. D., & Wilson, K. G. (2012).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The process and practice of mindful change (2nd ed.). New York: Guilford Press.
Hezel, D. M., & McNally, R. J. (2016). A theoretical review of cognitive biases and deficits in obsessive–compulsive disorder. Biological Psychology, 121, 221–232.
Olatunji, B. O., Davis, M. L., Powers, M. B., & Smits, J. A. (2013). Cognitive-behavioral therapy for obsessive-compulsive disorder: A meta-analysis of treatment outcome and moderators. Journal of Psychiatric Research, 47(1), 3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