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사는 또 다른 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 해리성 정체감 장애
정신의학신문 ㅣ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앞뒤가 다르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이중인격자’라고 합니다. 아주 좋은 사람인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 해온 사람이 알고 보니 나쁜 짓이나 배신했을 때, 착한 이미지와 나쁜 행동 사이의 간극을 꼬집어서 하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려고 이중인격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 실제로 자기 안에 여러 명의 인격이 존재하는 현상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는 이들인데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한 사람 안에 둘이나 그 이상의 다른 정체감이나 인격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양한 인격들이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일반적으로 한 인격(정체감)이 경험한 것들을 다른 인격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인격이 나타나는 동안 일어났던 일을 또 다른 인격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의 공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다른 인격은 원래의 내가 가진 정체감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요. 성격이나 인종, 성별, 나이 등이 다르게 나타나면서 행동 방식이나 사고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나타나는 원인으로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나 폭력과 같은 트라우마 경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스트레스 사건의 경험이 주요하게 꼽힙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으로 해리 현상, 즉 기억이나 의식, 정체감, 환경에 대한 지각 등이 붕괴되거나 차단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공포나 위협이 이어질 때,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직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보호를 위한 방어기제로 볼 수 있습니다. 해리는 연속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의식이 조각조각 분리되도록 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현실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차단기 역할을 합니다. 개인은 다른 인격을 통해 평상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힘든 상황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성적 학대나 폭력을 경험한 아동들의 경우 계속적인 물리적, 심리적 위협에 노출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따른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 안에 다른 정체감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면, 새롭게 만들어진 인격이 실제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센 존재일 수도 있고, 평소 자신이라면 하지 못할 직설적인 표현을 쏟아내는 강한 성격 혹은 아주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격은 원래의 자아가 표현하지 못했던 내적인 갈등이나 억압된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기도 하고, 원래 자아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로 상정되기도 합니다. 다른 인격을 통해 개인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안전감과 통제감을 느끼기도 하고, 잠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도 합니다. 반대로 또 다른 인격 중 누군가는 자신이 당한 학대와 폭력을 온전히 경험하고 기억한 존재로 설정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은 자아를 여러 개로 분리하면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찾습니다. 특히 트라우마가 어린 나이에 만들어지고 학대를 비롯한 고통스러운 사건의 정도가 심할수록, 개인은 다른 인격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서 나타나는 인격의 수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2~3개의 주 인격을 중심으로 다른 부수적 인격들이 있으며, 5~10개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수십에서 수백, 수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진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영화 <프라이멀 피어(1996)>에서는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소년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죄를 선고받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소년은 범행 당시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정신감정 결과를 토대로 변호사는 소년이 어린 시절 받은 학대로 인해 기억상실을 경험하는 환자임을 강조합니다. 소년은 결국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진단받아 살인죄에 대한 무죄 판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죄 선고가 내려진 그 순간, 소년은 변호사에게 사실 자신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가 아니며, 증상을 꾸며내 선고에 유리하게끔 한 것임을 밝히며 미소 짓습니다.
국내 드라마 중에서는 <킬미힐미(2015)>라는 작품에서 남자주인공이 7개의 인격을 가진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로 등장합니다. 재벌 3세인 주인공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신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고, 이를 위해 여자주인공을 비밀주치의로 고용합니다.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직업도, 사는 곳도 제각각인 7개의 인격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며 각자 자기 생각과 주장을 말합니다. 여자주인공은 이런 다양한 인격들이 나타나게 된 이유와 그들이 남자주인공의 생존에 가졌던 의미를 발견하며 인격들 사이의 통합과 치유를 위해 애씁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서로 다른 인격’의 공존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또 주변에서 잘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인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경험하는 분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고통, 비록 통합된 형태는 아닐지라도 각각의 인격이 그분들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필요한 치료적 도움을 통해 과거의 상처나 아픔을 치유하고, 통합된 정체감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최준배 원장
<참고문헌>
황성훈. (2010). 해리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 구조 특성. Korean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 29(3), 82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