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지 않을 권리, 판단 받지 않을 권리

2025-01-26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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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삶에서 중요한 기준이나 가치는 무엇인가요? 내가 옳다고 믿거나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념, 자기만의 기준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신념의 영역이나 대상, 확신의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죠. 이렇게 나만의 의견, 생각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흔들리지 않는 돛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거나 내 신념 안에 사로잡힐 때는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는 대화나 만남 자체를 시도하지 않고,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차피 저 사람은 바뀌지 않을 사람이니 말을 섞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만 남게 되고, 내가 가진 확신은 더 강해집니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부딪힐 일도 없고, 마음이 불편할 일도 없습니다. 마치 순풍에 돛단 듯 배가 앞으로만 순적하게 나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이 주는 다양성, 다채로운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한 풍성한 관계는 놓치게 됩니다. 내 관점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 내가 판단하는 기준, 그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외에도 다양한 정체성과 가치, 존재의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을 간과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정치나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부분 외의 다른 점에서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부분을 뛰어넘어 인간적인 유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나 종교라는 신념이 너무 절대적이고 중요한 기준점이 될 때는 그것 하나만으로 상대방의 모든 존재를 판단하고 더 이상의 대화나 교류를 중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단 이런 사례만이 아니라도 직장생활이나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에서 겪는 관계적 갈등, 가족 내 불화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상대방이 나와 다르고,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조직이나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다른 상사나 동료, 시간개념이나 경제 관념이 나와 다른 배우자, 연인의 얼굴이 떠오르시나요?

 갈등과 대립, 관계 단절의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안에는 상대방에 대한 판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가진 그 영역 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나와 대립하는 지점 외의, 그 사람이 가진 수많은 다른 특성들 말입니다.

 이런 영역으로 시선을 옮겨 상대를 바라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모습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바라보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신념에 비추어 제한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전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사실 판단하는 우리 마음속에는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소망이 숨어있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가치관,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나의 세계가 견고하고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지금까지 나를 형성해온 것들이 위협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지부조화를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래서 기존의 지식이나 생각에 반대되는 주장이나 대상이 나타났을 때는 밀어내고, 저항하게 됩니다. 밀리느냐, 밀어내느냐 하는 치열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고 승자가 된 순간, 비로소 ‘그동안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상대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쟁과 대립 구도에서는 상생이 아닌,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작동합니다.

 ‘당신의 생각 중에도 좋은 의견이 있고, 내 생각 중에도 좋은 의견이 있다. 반대로 당신의 관점에도 오류가 있고, 내 생각에도 오류가 있다. 그러니 당신의 생각 중 이 부분, 내 생각 중 이 부분을 합쳐 최선의 안을 도출하고 각자의 논리 속에 있는 오류는 이렇게 서로 보완해가면 좋겠다’ 하는 양보와 협력, 합의가 도출되기 어려운 구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 안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놓치게 됩니다. 상대방은 절대악, 나는 절대선으로 규정지으며 더 이상의 대화나 교류를 포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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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양상은 우리의 개인 삶뿐만 사회 전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021년 영국 킹스칼리지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의뢰해 전 세계 28개국 2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갈등지수 조사에 의하면 12개 항목 중 7개 항목에서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해당 항목은 이념, 빈부, 성별, 학력, 지지정당, 나이, 종교였습니다. 유사하게 전국경제인연합에서 2021년 발표한 <국가갈등지수 OECD 비교>에서 한국은 30개국 중 3위를 나타냈으며 정부의 갈등관리 능력을 의미하는 갈등관리 지수는 27위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서로 다른 의견이나 관점을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받아들이며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면서 갈등을 풀어가고 최선의 안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개인 차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부족한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강한 확신과 폐쇄적인 마인드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떤 대화도, 의견 교류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갈등으로 인한 개인적,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집니다. 또, 내가 상대방을 판단하는 만큼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판단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을 권리, 판단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