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휴식을 함께, 디지털 노마드와 워케이션
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빨리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날씨가 뜨거워졌던 만큼 여름휴가 생각이 더 많이들 나셨을 텐데요. 여름 휴가는 어디로 다녀오셨나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제주도 혹은 동남아시아 휴양지,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숲속 캠핑장, 미술관과 역사지구가 있는 국내나 해외 도시 등 원하시는 취향마다 다른 휴가지를 떠올리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휴가라고 하면 보통 한참 더운 시기,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일은 온전히 잊고 충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가장 휴가를 많이 가는 시기라는 뜻으로 7월 말 8월 초의 줄임말인 ‘7말 8초’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일과 휴식은 철저히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흔히 사용하는 ‘워라밸’, 즉 워크 라이프 밸런스라는 용어도 일과 삶의 균형만큼이나 분리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일과 삶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며, 일이 끝나고 난 후에는 개인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일과 휴식을 명확하게 분리하기보다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함께 한다는 의미의 ‘워케이션’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어디서든 원격으로 근무 가능한 사무환경이 조성된 곳이라면 워케이션이 가능하게 하는 기업도 느는 추세입니다. 워케이션을 통해 개인과 조직은 새로운 곳에서 활력을 얻고 창의성, 생산성이 올라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엔데믹 이후 재택근무 제도를 폐지하고 사무실 복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직원 복지를 위한 대안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워케이션이 활성화되고 있는 데는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이 원하는 시간에, 어디서든 자유롭게 일하고자 하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주요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 이전에도 원격근무나 거점 오피스 등이 활용되기는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와 원격근무가 상용화되고 원격으로도 업무가 가능함을 확인하면서 근무 형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촉진된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이미 2010년대부터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는 개념이 등장한 바 있습니다. 디지털과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노트북이나 휴대폰 등을 활용해 인터넷에 접속하고 디지털 환경 안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자유롭게 일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해외에서는 태국 치앙마이, 동유럽 국가 조지아 등이 원격근무를 위한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어 디지털 노마드에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곳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양, 속초, 제주 등 주로 자연을 즐길 수 있고 도심지에서 느끼기 어려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도시들이 워케이션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낯선 지역에서 짧게는 몇 주부터 길게는 몇 달을 머무르며 익숙하게 했던 일도 새롭게 느껴지고, 몸과 마음이 충전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물론 직종 특성에 따라 모든 직업군에서 워케이션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대면 서비스나 현장 근무가 필수적인 일의 경우 워케이션을 갖기가 어렵거나 가져도 길게 즐기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워케이션의 도입은 우리 사회에서 일과 휴식의 공존, 일하는 장소보다는 성과 자체에 집중하며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되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개인의 이동성(mobility)이 확장되고 중소도시들의 지역경제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 지역 도시에서는 워케이션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회 예산정책처 경제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36개국 중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에 이어 4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긴 노동시간이 평균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당 3.8시간 줄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전히 긴 노동시간과 높은 업무 강도라는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지만, 워케이션을 비롯한 일과 휴식에 대한 개념에서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서 일과 삶의 공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