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과 단절로 인한 어려움, 노년기 우울증

2024-09-24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중년들의 술자리 건배사로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99881234~!”라는 말인데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일이삼일 아프고 죽자(死)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장수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단순히 오래만 사는 것이 아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얼마나 사는가’ 못지않게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해진 것이죠.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즐겁게 장수하는 것, 아마 많은 이들의 소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직업 활동과 자녀 양육, 부모 봉양 등으로 바쁜 삶을 살다가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또 다른 삶의 페이지를 맞이하게 됩니다.

노년기는 에릭슨의 발달단계이론에 따르면 ‘자아통합 vs 좌절’이라는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는 시기입니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 것인데요, 이때 그간의 삶이 만족스러웠고 충만했다고 느낀다면 자아통합을 경험하지만, 삶이 후회스럽고 자신의 지난 결정이나 걸어온 길이 만족스럽지 못한다고 느끼면 낙담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노년기에 이르러 삶에 감사하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 어려움과 지난 삶에 대한 아쉬움으로 좌절과 우울감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수입원 감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질병이나 사고, 노화로 인한 신체적 활동 능력과 인지 기능 저하, 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친밀한 관계의 상실, 자녀를 비롯한 가족들과의 불화나 대인관계 단절, 사회적 고립 등은 우울증의 위험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사진_ freepik

우리나라는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노년기 우울증 역시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연령별 우울증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우울증으로 의료기관을 찾은 사람 중 60대 이상 노인이 25만 1,945명으로 전체 우울증 환자의 41%에 달했습니다. 또, 2020년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노인 우울증 등 정신질환 관련 진료 현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우울 에피소드와 재발성 우울장애를 겪는 노인은 2010년 19만 5,648명에서 2019년 30만 9,749명으로 58%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함께 노년기 우울증으로 인한 노인 자살 역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노년기 우울증은 다른 연령대에서 나타나는 우울증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더 세심한 관찰과 주의가 요구됩니다. 노년기 우울증은 우울증의 주요 증상인 흥미 저하와 우울한 기분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보다는 ‘소화가 잘되지 않거나 입맛이 없다, 기력이 없다, 몸이 아프다’ 같은 신체적인 불편감과 질환, 불면증, 불안감이나 초조감, 인지능력과 기억력 저하에 대한 호소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울감을 경험하는 당사자 역시 이를 우울증이 아닌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나 신체질환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진단이나 치료보다는 치매,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과 같은 기타 인지 및 신체적 질환의 치료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에서도 이 같은 호소를 우울증이라고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한 외로움, 꾀병, 노화에 따른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같은 노년기 우울증에 대한 인식과 이해 부족은 조기 발견과 치료가 지연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사진_ freepik

하지만 노년기 우울증은 적절한 진단과 치료적 개입이 이뤄진다면 호전될 수 있으며, 원인에 따라 치료 방법 역시 다양합니다. 신체질환에 따른 우울감이 주된 증상이라면 해당 질환에 대한 치료에 더 집중하기도 하고, 약물치료와 상담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약물치료를 통해서는 세로토닌을 비롯한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상담을 통해서는 상실이나 고독감, 단절감, 짐이 되는 느낌, 자존감 저하와 같은 심리적인 부분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또, 노년기 우울증에서 혈관성 우울증의 유병률이 높게 나타남에 따라 혈관성 질환에 대한 관리 및 이와 관련된 우울증 발병 예방을 위한 의학계의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노년기 우울증과 깊은 연관을 보이는 경제적 취약성과 사회적 고립, 단절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사회 안전망 및 복지체계도 중요한 한 축으로 작용합니다. 노년기 우울증은 심리적, 사회적, 생물학적 요인이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기에 치료 과정에서도 다각적인 접근과 동시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노년기에는 신체적, 인지적 능력의 저하와 함께 사회적으로도 위축되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움을 청할 누군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 혼자라는 느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감은 우울감을 가중합니다. ‘어르신’으로서 존경의 대상이자 삶의 지혜를 가진 분들로서 노인들을 바라보았던 과거에 비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인들은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라잡지 못하며 도태되는 존재, 짐이 되는 존재로 평가절하되기도 합니다. 뉴스 기사에서는 고독사한 노인이 백골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됩니다. 노년기 우울증과 노인들의 사회적 고립,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문제들에 지금 관심 갖고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언젠가 우리 또는 다음 세대가 고스란히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도적, 정책적 접근과 함께 개인 차원에서는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르신들이 혹시 나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우울감으로 힘들어하고 계시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입니다. 또, 본인이 노년기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자신의 상태를 감추거나 애써 외면하기보다 가까운 주변 분들과 나누시고 전문가를 통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