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족으로부터 건강하게 분리하는 법
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 바로 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평생 길러준 부모님,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해온 형제자매를 포함하는 원가족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가족 안에서의 역할과 위치, 관계, 가족 분위기와 문화는 우리의 사고방식, 습관, 행동양식,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 사이가 화목하고 가족 안에서 긍정적인 경험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가정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나 불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반목이나 심각한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각 구성원이 가족 내에서 갖는 고유의 기능이나 역할에서 비롯된 부담이나 역할 갈등을 겪기도 하죠. 또,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나 역기능적인 가족 간 상호작용이 관찰되기도 합니다. 이는 부부간의 갈등일 수도, 혹은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일 수도, 또는 가족 내 특정 구성원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은 생애주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며, 시기마다 다른 과업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 처음 부부가 결혼해 가정을 꾸릴 때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며 맞춰 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원가족과 맺고 있던 관계의 방식이나 생활 습관, 가족 내 이슈가 다시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부모님에게 의존적인 경우라면 결혼 후 경제적, 정서적, 물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부부로서 부모님보다 배우자를 더 삶의 중심에 두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함께 의논하며 해결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때 익숙한 방식대로 부모님에게 의존하거나 배우자보다 부모님의 의견에 좌지우지된다면 부부 갈등이 심화됩니다. 반대로 배우자가 가족 내에서 가장이나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 왔던 경우를 떠올려 볼 수도 있습니다. 결혼 전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기 위해 수입 중 일부를 계속 드렸는데, 결혼 후에도 배우자에게 상의 없이 혹은 배우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원을 이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과를 예상해 보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부모님이 가정을 이룬 자녀의 삶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기도 합니다.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대신 수시로 집에 찾아간다든지, 아이를 언제 가질지 계속 추궁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이 떠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녀의 독립이나 결혼을 반대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떠났을 때 빈 둥지 증후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평생을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던 부모님을 떠나가는 것은 자녀에게도 어려운 도전이지만, 떠나보내는 부모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가족 간의 정이나 부모님에 대한 효(孝)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부모 자녀 간의 분리와 독립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은 흔히 “내가 너 하나 보고 살았다.”라는 말로 자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자녀들은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부모를 떠나는 데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낍니다. 성인이 되어 자아 분화와 독립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를 부모나 자녀 모두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함에도 보내기도, 떠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의존적인 관계 외에도 원가족 안에서의 갈등이나 미숙한 해결 방식이 새롭게 꾸리는 독립가정 안에서 그대로 표출될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의 불화로 어렸을 때부터 늘 착한 아이 역할을 해야 했던 남편이 있다고 해 봅시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 큰소리를 내며 싸우던 부모님으로 인해 남편은 ‘나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면 안 된다. 나는 불편한 것이 있어도 우리 집의 평화를 위해 참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어린 시절부터 내재화해 왔습니다. 그래서 갈등 상황이 생겨도 본인의 생각을 밝히고 직면하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회피하는 방식이 익숙해졌습니다.
반대로 아내는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이야기하고 풀어야 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어떤 그림이 예상되시나요? 아마 아내는 문제를 피하는 남편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반대로 남편은 자꾸만 답을 내려고 하고 직면시키는 아내를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이렇게 원가족 내에서의 역동과 갈등은 원가족을 떠나 독립한 이후에도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문제가 원가족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내가 지금 왜 이런 문제를 겪고 있을까 답답해할 뿐입니다. 혹은 원가족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임을 자각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다뤄 나가야 할지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원가족으로부터 건강하게 독립하고 원가족 안에서의 갈등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원가족 안에서의 갈등을 이해하기
원가족 내에서 주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로 갈등을 겪었는지, 각 가족 구성원은 어떤 역할이나 태도를 보였는지, 원가족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2. 나의 대처방식 파악하기
그렇다면 나는 그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가족과의 갈등 상황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인지, 신체적 반응 등을 살펴보고, 그것이 현재의 삶 속에서 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 겪었던 갈등 상황이나 반복되는 갈등의 원인이 원가족 내에서의 갈등과 어떻게 유사한지 혹은 다른지를 비교해 보고, 그때 내가 보였던 반응은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그때 내가 문제 상황을 원가족과의 갈등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았는지, 원가족 내에서 느꼈던 불안과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했던 대처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3. 새로운 사람들, 독립가정과 원가족을 분리하기
원가족 내에서 경험하는 관계, 타인에 대한 신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원가족에게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기대를 투사하기도 합니다. 원가족 내에서 좌절과 실망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의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친밀한 관계 형성이 도전적인 과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가족과의 관계가 앞으로 경험할 모든 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원가족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많은 관계와는 달리 원가족과의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고, 불편해도 완전히 무시하거나 단절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이었다면 다시 안 볼 것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내 가족 구성원일 때는 불편함이나 힘듦을 감수하고 관계를 지속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니, 이것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가족이 갖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가 필요할 때 가족들이 보내주는 응원과 격려는 세상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족이 반드시 힘과 지지의 원천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가장 큰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처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한 숙제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원가족으로부터의 건강한 분리와 독립은 우리가 원가족 내의 갈등에 함몰되거나 과거의 역기능적인 관계 속에 고착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더디고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끊임없는 연습과 성장이 수반된다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에 매일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