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라이팅, 긍정 이데올로기에 지친 사람들
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처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웠던 문장, 기억나시나요? 대표적인 예문 중 하나가 바로 “How are you (어떻게 지내요)?”일 텐데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I’m fine thank you, and you? (나는 잘 지내요, 당신은요?)”를 거의 구구단 외우듯 익혔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받을 때면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I’m fine.”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실제로 잘 지내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꼭 영어로 이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잘 지내냐는 지인들의 안부 인사에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으레 잘 지낸다고 답하고는 합니다.
미국은 긍정성을 강조하는 문화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긍정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표현되곤 합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세계에서 가장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특유의 낙천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풍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미국인이라고 모두 밝고 긍정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긍정성을 지향하는 듯한 양상을 나타냅니다.
이런 긍정성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의지, 회복탄력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맞이하는 히어로물이 많습니다. 긍정성에 대한 강조와 함께 미국에서는 한동안 라이프코칭, 긍정의 힘과 관련된 출판물, 강연 등이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긍정적 태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우울이나 불안을 낮추고 신체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등 여러 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나 긍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지나치게 감사와 긍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제 느끼는 기분과 관계없이 사람들 앞에서 늘 밝은 모습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심리적 괴리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힘들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도 “I’m fine.”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규율이 솔직한 감정 표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죠.
이에 반해 같은 영어권이지만 영국에서는 “How are you?”라는 질문에 자신의 현재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거나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데 크게 부담을 갖지 않으며, 듣는 상대방 역시 불편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같은 외국의 사례가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긍정성 속에 감춰진 솔직한 감정 공유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피로감이 비단 미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감사하는 태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그 자체로 좋은 자원이며 삶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긍정성, 감사를 강조하며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자세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자칫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나 개선점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에 불만을 갖거나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판적 목소리, 혁신적 마인드를 가진 이들로 보기보다는 모난 사람들로 규정짓기 쉽습니다. 모두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감사하는데 왜 혼자 반기를 드느냐며 불편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면 다양성, 비판적 성찰을 통한 개선과 같은 사회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인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긍정성 못지않게 현실을 직시하며 사회 안에 존재하는 문제점, 개선점을 파악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 잘 지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내가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저 사람은 항상 잘 지내는구나.”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또, 잘 지낸다는 한 마디 외에 더 깊은 대화로까지는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 지내지 못하거나 뭔가 문제가 있을 때, 솔직하게 나누는 것이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을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혹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중에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너무 깊은 속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선에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나 현재 상태를 나누는 것은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하고, 이야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카타르시스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감하고 위로를 해줄 수도 있겠고요.
감사와 긍정성이 주는 이점을 기억하면서도, 그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우리에게 피로감, 괴리감을 주지 않도록 균형을 잘 유지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How are you?”에 대한 답이 더 다양해지는 우리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