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물이 가지는 정신역동적 의미

2024-08-25     변성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변성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과의 특성상 ‘향정신성의약품(Psychotropic drug)’을 처방하는 경우가 다른 과에 비해 많습니다. ‘향정신성의약품(Psychotropic drug)’의 사전적 정의는 1)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며 2)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환자에게는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것 이외에 약을 먹는 행위에 따른 정신역동적 감정 경험도 동반합니다.

인간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행위에 대해 무의식적인 정신역동이 있습니다. 저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하던 같은 약을 다른 상황에서 처방 할 때도 있습니다. 인턴으로 일할 때는 통증이나 내과 약을 처방한 적도 있고, 정신과 의원이 아닌 다른 과 병원에서 일할 때는 좀 더 다양한 환자에게 다양한 약물을 처방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향정신성 약물의 처방 시 환자의 반응은 다른 과 약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정신 문제를 어찌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나의 고민을 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정신과 약은 중독 된다."

"정신과 약은 오래 먹으면 바보 된다."

 

제가 환자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이것 이외에도 정신과 약에 대해 사람들이 부정적이고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진_ freepik

 

● 향정신성의약품은 정신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 치료에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약물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제가 처방하는 약을 저뿐만 아니라 내과 전문의, 신경과 전문의, 정형외과 전문의 등 다양한 과와 다양한 질환에서도 처방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약,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같은 약을 처방해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한 약은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고 반감이 생기는 현상을 많이 경험합니다. 실제로 신경안정제, 기분조절제 등은 경련성 질환, 뇌병변 질환의 치료에도 많이 쓰이고 있으며 항우울제의 경우 신경병성 통증이나 과민성대장증후군의 증상 조절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 약물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경험하는 감정 변화도 중요한 치료의 요소

약물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반응과 감정은 환자를 이해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약물 치료로 초래된 신체적, 정신적 효과에 대해서도 환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또한 환자 자신의 과거 경험, 현재 정신장애의 내용 등 정신역동적 상태에 의해 결정됩니다. 약물을 부정적인 bad object로 보는 것은 환자의 외부 세계를 향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관점은 환자의 과거 대인관계나 대상관계 경험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약물 치료가 환자의 정신내적 과정(intrapsychic process)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임상가는 잘 파악해야 합니다.

 

●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와 의사의 치료 동맹(Therapeutic alliance) 형성이 중요

환자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다양한 감정 반응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공포, 죄의식, 분노 등 다양한 감정 반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감정 반응은 투약에 대한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고 의사-환자의 치료 동맹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누구 하나만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치료 동맹(Therapeutic alliance)이 잘 형성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부작용 발생 시 무작정 부작용을 숨기거나 의사를 불신하고 회피하기보다는 의사와 잘 상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진_ freepik

 

● 오용과 남용은 치료 용량 이상 복용한 경우 발생

세상에는 중독성 물질들이 많습니다. 오용과 남용은 비단 약물 뿐만이 아니라 스마트폰 같은 영상 매체부터 술, 담배 등의 기호 식품 등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약물은 오히려 전문가에 의해 투약이 결정되며 광범위한 연구 데이터에 의해 치료 용량이 결정되기 때문에 오용과 남용에서 위험성이 덜 할 수 있습니다. 술은 내 마음대로 마셔도 제재할 수 없지만 약물의 경우 하루 투약량을 넘겨 처방하는 의사는 없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복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약물 관리 시스템이 잘 정착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확립되어 있고,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약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rug Utillization Review)는 의사 또는 약사가 의약품 처방·조제 시 환자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과 중복되는 약 등 의약품 안전정보를 요양기관에 실시간 제공하여 안전한 의약품 사용을 지원하는 서비스로서 향정신병의약품의 경우 이러한 서비스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다른 의료 기관에서 동일한 약을 처방받는 경우 중복 처방을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자가 여기저기에서 약을 처방받아 의약품을 치료 용량보다 과량 복용하지 않도록 사회 안전 시스템이 잘 확립되어 있습니다. 

 

● 약물치료의 정신역동적 의미

치료 순응도(treatment adherence)란, 한 개인의 치료 행동이 의료진 권고와 얼마나 일치하는가의 정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WHO는 “합의된 의료인의 권고안에 환자의 행동-약물 복용, 식이 요법, 생활 습관 변화 등-이 얼마나 부합하는가의 정도”로 정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하루 4번 1개씩 일주일 동안 복용하도록 처방받은 약물을 5일간 하루 1번 2개씩 복용했다면, 이때의 약물 치료의 순응도는 36%가 됩니다.

약물 비순응(Non-adherence)이란 처방된 약을 복용하지 않거나 치료진과 상의 없이 용법, 용량 등을 조절해서 복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물 비순응은 보통 처방된 약물 용량의 80% 미만을 복용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처방된 용량보다 너무 많은 양을 복용하는 것도 비순응에 해당됩니다. 약물 치료에 대한 치료 순응도는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입니다. 약물 비순응은 건강 상태, 부작용 등과 연관이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같은 약물과 동일한 용량을 처방해도 환자가 약물 처방에 대해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고 약물 치료에 대한 순응도는 0%~100%로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약물 치료에 투영될 수 있습니다. 우울감이 심한 경우 약물 치료를 권고하는 의사의 말에 큰 상실감과 패배감, 절망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쉽게 좌절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불안감이 높은 사람은 약물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부작용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작은 약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런 변화로 몸에 심각한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중독적 성향의 사람은 투약 용량이나 용법을 지키지 않고 자의로 더 복용하기도 합니다. 약의 효과가 없다며 의사를 비난하기도 하고 약을 더 처방받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서 치료 약을 더 처방받기도 합니다. 피해 망상이 있는 환자는 약물에 의한 효과로 자신이 파괴되고 손상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으며 의사를 쉽게 믿지 않습니다.

 

● 성공적인 치료를 향한 길

결론적으로 향정신성의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우리나라에서 환자는 의사의 투약에 대해 확고한 신뢰를 갖고 환자와 의사간 치료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치료 동맹 하에서 환자-의사 상호간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약물 치료에 대한 순응도는 상승할 것이고 치료 순응도의 상승은 결국 환자와 의사가 공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공적인 치료로 이어질 것입니다. 

 

뉴브레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변성혜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