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와 함께하기 위하여

2024-06-16     심경선

 

무릇, 겨울이 지나면 어떻게든 봄이 오고, 봄 다음에 여름이 오기 마련이다. 기상이변이 있어도 큰 틀에서 봄은 봄이고, 여름은 여름이다. 지난한 겨울이 지나고 강력한 봄이 모든 나무의 가지마다 푸른 잎을 피우더니, 슬며시 여름이 온다. 왔다. 나는 이맘때의 모든 풍경을 사랑한다. 봄이다가 여름이다가 갈피를 못 잡게 하더니, 긴 산책에는 땀이 나고, 그러다 가만 서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순식간에 땀을 식힌다. 노을이 아름답고, 노을과 함께 바라보면 곁에 있는 식물도 꽤 그럴싸하게 보인다. 

정신적 위기에 닿으면 지남력(통상 사람, 장소, 시간의 지남력으로 구별되고 있다.) 이 약화된다. 자신을 향한 정신적 고통에 휘말려, 사람과 장소와 시간 등은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는 것 이다. 최근까지 내가 그랬다. 정신적인 고통에 휩싸여 잠도 못 자고 먹는 것도 제 때 먹지 못한 내가 가장 먼저 떨어진 감각은 지남력 이었다. 분명 조금 전에 시계를 봤는데, 몇 시 였는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해둔 병원 방문 일정이 한 시간 전에 기억나는 등.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사람까지도 중요해지지 않아졌다. 낮에 온 문자에 새벽 한 시에 답을 하고, 괜시리 일찍 깨서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영업시간을 종종거리며 기다린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계절의 변화도 무디게 느끼곤 하는데, 29도까지 올라간 초여름, 쟈켓을 챙긴다든가. 짐을 정리하는 손길에 도톰한 스타킹이나 양말 등을 고민하다가 힘껏 생각해낸 후 겨울 박스로 넣는 일 따위를 한다. 하는 수 없다. 지금도 이미 이토록 힘을 내고 있지 않은가. 치료를 진행중인 모든 환자들은 어느 날은 나태할지 언정 대부분의 날을 성실한 버팀으로 살아내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낼 수가 없다. 내가 나 일수가 없으니까.

그런 와중에 지나다가 바닥에 제철 꽃이 피었다든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향기로운 이름 모를 식물을 마주하면 뭉클, 하게 되는 것이다. 단단하게 정비해서 무엇도 제대로 못느끼는 줄 알았는데, 식물이 피어나고, 자신을 쳐다보도록 하는 것, 그것에 성실히 꼬여든 나는 정신병이니 지남력이니 모든 것에서 벗어나 향도 실컷 누리고 사진도 찍고 주변을 서성인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주변을 바라본다. 쳐다보고 나니 이 나무가 첫 나무가 아니었다. 같은 종의 나무가 계속해서 나를 두드린 것이다. 대 여섯 나무를 지나쳐 드디어 올려다 본 나무가 내 마음을 대신 해 말한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그런 시간들이야. 계절을 함께 해봐.”

 

 

그때 그때 계절을 알아채고 감격하고, 누리는 일들이 꽤 괜찮고 여유로운 태도에서 가능하다지만, 주말마다 등산까지 하지 않아도, 벌이 날고 초록의 잎은 조금씩 짙어지고 있는 것 정도는 도심 한복판 가로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특히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에게는 주변 어디서든 변화하는 자연을 느껴 보기를, 실컷 만끽하고 관찰하기를 권한다. 이름 모르는 식물이라도 얼마든지 괜찮다. 

“얘는 꽃인가? 지금 느껴지는 향기는 이 꽃에서 나는 걸까? 어라, 가지만 있던 나무에 어느새 잎이 이렇게 가득 난거지?” 

집중해서 식물을 관찰하는 일은 ‘내가’, ‘이 곳’에서 ‘지금’의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끔 하는 명상이 식물을 관찰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곳을 추구하는 일, 꽤나 마음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발걸음 맞춰 걸으려 하다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갉고, 물을 주지 않아 거친 상처가득, 메마른 마음에 야들한 연초록 빛 잎이 잔뜩 피어날지, 그 초록이 또 다른 누군가를 붙잡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심경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