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숫자, 매직넘버 7과 단기기억
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숫자 4나 7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4는 한자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 예로부터 불길한 숫자로 여겨졌습니다. 아파트나 빌딩의 엘리베이터 중에는 4층 대신 F층이라고 표기한 곳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7은 행운을 의미하는 숫자로 여겨졌지요. ‘럭키 세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편 서양에서는 13을 불길한 숫자로, 기독교에서는 3을 완전수로 여깁니다. 이처럼 나라나 문화권마다 특정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숫자 7은 행운의 숫자만 아니라 ‘매직넘버’로도 유명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하시다고요? 이제부터 그 비밀을 함께 파헤쳐 보겠습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조지 밀러(George Miller)는 1956년 <마법의 수 7±2: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라는 논문을 통해 단기기억에서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7개 내외, 즉 5개에서 9개 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단기기억(short term memory)은 오랜 기간 뇌에 저장되는 장기기억(long term memory)과 대비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전화번호부에 적힌 번호를 기억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거는 것, 방금 본 이미지나 단어를 몇 초나 몇 분 후처럼 짧은 시간 뒤에 다시 기억해내는 것과 관련된 기억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단기기억 대신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밀러는 단기기억에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정보를 의미 있는 단위로 처리한다고 보았으며, 그 단위를 ‘청크(chunk)’라고 불렀습니다. 청크는 영어로 ‘큰 덩어리’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주어진 정보를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청크 단위로 분류함으로써 기억력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0313144878이라는 숫자가 있다고 하면, 031(경기도 지역번호)과 314(원주율)을 각각 하나의 청크로 보고 031-314-4878이라는 총 여섯 개의 청크(1+1+4)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54319203이라는 숫자는 5431-9203처럼 두 개의 청크로 무작위로 구분해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매직넘버와 청킹을 통해 우리는 작업기억에 정보가 쉽게 저장될 수 있도록 하며, 때로는 청킹에 이미지나 스토리를 활용한 연상법을 가미해 저장된 정보가 쉽게 인출(retrieval)될 수 있도록 합니다. 031-314-4878을 예로 들면, ‘경기도(031)에 가서 원주율(314)을 측정한 뒤 칠판을 사고팔았다(4878)’라는 스토리를 만들어서 머릿속으로 그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작업기억에 더 오랫동안 정보가 머무를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자극으로부터의 간섭 효과로 입력된 정보가 휘발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 과정에서 청킹을 통해 입력한 정보를 끊임없이 암송(rehearsal)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정보가 들어와서 암송을 못하면 기억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존 브라운(John Brown)과 미국의 심리학자 로이드 피터슨(Lloyd Peterson), 마가렛 피터슨(Margaret Peterson)은 1958년 실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세 개의 낱자를 학습하게 한 뒤 짧은 시간 동안 제시된 숫자를 3씩 거꾸로 세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실험참가자들은 처음에는 낱자를 기억했지만 이후 시행에서는 낱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숫자를 세는 동안 낱자를 마음속으로 암송하기 어려웠고, 이전에 보았던 낱자들과 새로운 시도에서 본 낱자들 사이에 간섭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실험 결과는 작업기억의 한계와 암송을 통한 기억 효과를 보여주며 이후 작업기억과 관련된 인지심리학 분야의 실험이 활성화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청킹, 암송, 연상법 같은 전략을 활용해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무르게 하고자 노력합니다. 학창 시절 수없이 썼던 암기 노트, 중요한 단어들의 앞 글자 따서 외우기,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만들어 기억하기 등 공부한 것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애썼던 시간이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업기억과 매직넘버, 청킹의 개념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미 우리는 청킹을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이지요.
밀러는 청킹이 7±2라고 했지만, 매직넘버가 반드시 7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매직 넘버를 4라고 보기도 했고, 청킹이 기억과 학습, 인지 영역을 넘어서 디지털 서비스 등에서 최적의 사용자 인터페이스(UI) 구성을 위한 기준으로 활용되면서 사용자들의 인지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더 간결한 단위로 변용되기도 했습니다. 사용자들이 정보를 하나의 구분되는 청크 단위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디자인적, 기능적 효율을 개선하는 데 활용하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구획을 나눠서 기사를 구분하는 것, 미술관에서 전시관을 작가별, 시대별로 분류하여 관람객들이 해당 전시관의 특징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큰 단위에서의 청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청킹이 우리 삶 가까이, 많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도 청킹을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집이나 사무실 공간을 기능이나 필요에 따라 청킹 단위로 분류해 공간을 재배치하여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고,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을 식생이나 색깔, 크기, 높이 등과 같은 기준으로 분류해서 관리해볼 수도 있습니다. 청킹을 통해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배치된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고 효과적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삶의 다양한 영역에 청킹을 활용하여 삶이 더 짜임새 있고 안정된 모양새를 띠도록 하는 것입니다. 청킹과 함께 여러분의 기억력뿐만 아니라 삶이 함께 향상되는 경험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