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심리학 3 - 내가 형편없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겁나는 사람들에게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드디어 그동안 꿈꿔 왔던 회사로 이직에 성공한 당신. 업계 1, 2위를 다투는 회사로 이직한 것도 모자라 연봉이 두 배 가까이 뛰었고 나를 찾아오는 클라이언트의 수도 확연히 늘어났다. 가족, 친구들의 축하 연락을 받던 당신은 이때 무슨 생각을 할까?
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내가 뽑힌 이유가 뭘까? 분명히 뭔가 다른 음모가 있는 거야. 세상이 나를 두고 몰래카메라를 찍나?
②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를 안 뽑으면 누굴 뽑아? 연봉을 두 배로 올려준 것도 내 능력을 알아봤다면 마땅하지. 아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두 번째 답을 골랐다면 당신의 자신감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적 성취를 많이 이룬 사람들일수록 그 답은 첫 번째 쪽에 가까워질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 왜 나를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지? 그리고 나는 연기도 할 줄 모르면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연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이 발언의 주인공은 미국 아카데미상에 21 번이나 후보로 지명되어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총 세 차례 수상한 배우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유명인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엠마 왓슨(Emma Watson),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 이르기까지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끝판왕'들이 그래왔다. 그들은 마치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고백했다.
물론 유명인이 아닌 우리도 마찬가지다. 2020년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무려 62퍼센트가 자신이 유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동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다고 답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그토록 불안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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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꾼 증후군
년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의 폴린 클랜스(Pauline Clance)와 수잔 아임스(Suzanne Imes)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했다. 둘은 사업, 의료, 법률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둔 여성 150여 명과 5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높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사실은 그리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만 같다고 고백했다!
클랜스와 아임스는 여기에 '임포스터 현상(imposter phenomen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사기꾼 현상(증후군)'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마치 사기꾼 같은 사람으로 여기며 실체(?)가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들에게는 이런 특징들이 있었다. 다음은 클랜스가 임포스터 현상을 평가하기 위해 마련한 기준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① ᅠ어떤 과제를 맡았을 때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지만 결국 잘해낸 적이 많다.
②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게 두렵다.
③ 생각만큼 내가 능력이 없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다.
④ 내 성과에 대한 인정을 받았을 때 스스로 그 일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⑤ 내가 잘해낼 수 있었던 건 모두 운 덕분이라 생각한다.
보통 간절히 원하는 직장에 합격하거나,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거나, 승진하거나,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이런 마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했다면 치열했던 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않았던 대로 염려하기 시작한다. 경쟁이 치열했다면 "이렇게 경쟁이 치열했는데 내가 뽑혔다는 건 운이나 실수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다면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운 좋게 내가 뽑힐 수 있었던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임포스터 현상은 물론 고통스럽지만 병적인 것은 아니며, 이런 증세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임포스터 현상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3603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실험에서 임포스터 현상의 유용한 효과를 밝혀내기도 했다. 연구에서는 실험 참여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과대평가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하면서 임포스터 현상을 자극했고 다른 집단에는 그저 전날에 먹었던 점심 메뉴를 떠올리도록 했다. 이후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모의 면접을 진행했는데, 그 결과 임포스터 현상이 자극된 집단이 유능함과 효과적인 대인관계 기술 측면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임포스터 현상이 자극되는 경우 타인을 의식하는 마음이 발현되어 타인 지향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포스터 현상은 언제 문제가 될까? 이것 을 알기 위해서는 임포스터 현상이 생기는 경로를 먼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감정적인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최악의 결과가 발생했을 때 받을 충격을 줄이기 위해 최악의 결과를 미리 각오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을 때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타격이 덜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임포스터 현상을 일으키는 셈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상반된 두려움이 공존하게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성공을 두려워한다니!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의 무의식 안에는 놀랍게도 이런 마음이 존재한다. 내가 성공하면 나는 사람들을 완벽히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한 사기꾼이 되는 셈이니 두려운 것이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이 지나치게 커져서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때 임포스터 현상은 문제가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나머지 스스로를 지나치게 혹사하다가 번아웃이 올 수도 있다.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크면 남들이 보기엔 수월히 달성할 수 있는 일조차 스스로 자격이 없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 도전을 단념하여 손해를 보기도 한다.
▶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알기
그렇다면 임포스터 현상을 균형 있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임포스터 현상이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의 대표적인 결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원적 무지란, 오로지 나만이 집단과 다른 특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집단의 다수가 그런 특성을 가진 경우를 말한다. 즉, 이 집단에서 나만이 사기꾼이며 이것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집단의 다수가 각자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 감정이 나만의 이상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수록 안심이 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법을 '보편화(universalization)'라고 한다. 나의 걱정이나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보편화에 도움이 될 만한 사례 하나를 이야기해 보겠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같은 과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데 친구가 내게 고백하듯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실 내가 대학교에 붙은 게 우연이거나 실수인 것 같아.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거나. 그래서 앞으로의 공부를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임포스터 현상을 겪고 있던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증거를 틈날 때마다 모으는 것이다. 칭찬의 말이나 편지, 문자 등 좋은 성과로 사람들에게 받았던 긍정적인 메시지 또는 높은 점수 같은 수량화된 평가처럼 임포스터 현상에 지나치게 휩싸일 때마다 숨을 고르고 들여다볼 단서들을 틈틈이 모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아주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증명을 해주는 자료까지는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내가 형편없는 사기꾼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려줄 수 있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정말 누구나 실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스스로가 사실 운의 힘으로 버텨 온 실력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자신이 크고 작은 실수를 하는 상황에서 특히나 자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수는 형편없음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뛰어난 사람조차도 반드시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수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을 주의하자.
어느 날 올림픽 배구 경기를 보던 중 새삼스럽게 느낀 점이 있었는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국가대표들마저 서브 실수로 실점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밥 먹고 그것만 한다'고 할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서브 연습을 한 그들도 실수를 한다. 하물며 국가대표도 아닌 우리는 어떨까? 어떤 날에는 당연히도 실수 연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대표도 실수를 하는데, 나라고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헤매던 순간만을 떠올리며 기어코 내 실체가 드러났다고 통탄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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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었는데도 여전히 내가 진짜 사기꾼일까 봐 두려운가? 스스로가 사기꾼일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치고 진짜 사기꾼이기도 쉽지 않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좋겠다. 여전히 내가 억수로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느껴지는가? 그렇게나 운이 좋을 만큼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기도 쉽지 않으니 역시나 안심하자.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반유화 원장
-『출근길 심리학』에 수록된 에피소드 「반복되는 월요일이 여전히 두렵다면」에서 발췌,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