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자회견이 우리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
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한 대형기획사 산하의 자회사 대표가 연 기자회견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POP 산업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회사에서 발생한 내홍이라는 점에서도 충분히 이목을 끌 만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자회견의 형식과 내용이 굉장히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당사자의 복장이 매우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최근 그의 심경이 드러나 있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가 이야기한 내용들은 이전 직장에서의 성공 및 인정에 관한 것, 현재 회사에 합류하게 된 히스토리, 그간 겪어 온 일들과 답답함에 대한 것과 함께 기자회견장에서 들을 수 없을 법한 일부 비속어와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 가미되어 많은 대중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런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에 관해 일각에서는 기자회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은 많은 직장인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직장생활 중 경험하는 부당함과 억울함에 많은 직장인이 자신도 겪어 본 일이라며 감정이입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어려움을 공식 석상에서 여과 없이 표출한 모습에 일종의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반응도 상당합니다.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성과 가로채기, 사내 정치, 보상과 인정 부족과 같은 면을 속 시원히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성으로서 직장생활을 하며 느끼는 어려움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여성 직장인들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이기에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자회견과 그 후 이어진 많은 사람의 공감이 우리 사회에 갖는 시사점에 관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능력이나 성과보다는 사내 정치가 우선시되고 나의 열심과 노력이 오해받고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릴 때, 우리는 좌절과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일이 좋아서, 성장하는 내 모습과 눈으로 보이는 성과가 좋아서, 보람에 차서 일하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해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싶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달려온 것인지 후회스럽습니다.
이런 현상이 단지 몇몇 해로운 직장에 해당하는 이야기면 좋겠습니다만, 많은 사람이 이번 사태에 이렇게 공감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는 안타까운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런 흠도 없이 완벽하기만 한 직장을 바라는 것은 유토피아적 환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의 애환과 그 안에서 느끼는 다양한 갈등과 회의감에 익숙해진 우리가 바라는 것은 완벽한 직장이 아닌, 건강한 직장 아닐까요.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고, 일과 관련 없는 사내 정치에 의해 내 위치가 위협받지 않으며,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고 서로가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받으며 협력하는 그런 곳 말입니다.
‘감탄고토’나 ‘토사구팽’이라는 말처럼 조직이 나를 쓰고 버린다는 느낌, 나의 성장이나 내가 회사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나를 없애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충격을 넘어 심리적 트라우마와 배신감이 밀려듭니다.
건강한 조직은 구성원의 성과와 기여를 긍정하고 격려하며,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또, 구성원이 계속해서 역량을 계발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경력개발계획(CDP: Career Development Plan)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구성원이 요청하기 전에 조직에서 먼저 새로운 분야나 더 전문적이고 특화된 커리어 분야로의 확장 및 탐색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이 구성원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성과와 지속적인 성장에도 궁극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회사 대표인 기자회견 당사자를 일반 직장인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아무리 직장인의 애환을 이야기한다 한들, 한 회사의 대표와 일반 직장인들이 느끼는 고충이 같을 수 없고, 그가 받는 고액 연봉이나 임원으로서의 지위를 생각할 때 그것을 K-직장인의 애환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높은 지위와 많은 권한을 가진 임원과 직장인의 애환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강한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많은 이들이 이 기자회견에 그토록 공감한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숙하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위해 조직과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며, 작은 것이라도 바꾸고 실천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위협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려움이 닥칠 때는 내부 구성원들이 오히려 하나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부의 적이나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며 단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봤을 때 조직이 성공하고 안정적이라고 여겨질 때, 그때가 어쩌면 진짜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이익과 입장을 내세우며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조직 내부에서 건강하지 못한 조직문화로 인해 서서히 뿌리에서부터 썩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조직이 상생하고 협력할 수 있는 건강한 직장문화, 조직문화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