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통이다”, 우리가 쇼펜하우어에 주목하는 이유
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여러분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 배우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는 장면이 방영되면서 해당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덩달아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한 다른 책들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관심의 바탕에는 유명인이 읽은 책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인생이 고통이다.”, “인간관계나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마라.”라는 그의 메시지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박탈감, 남들이 가진 것을 나는 갖지 못했다는 비교의식, 인생이 너무 힘들다는 피로감과 인간으로서 느끼는 근원적 고독감을 쇼펜하우어가 건드려 준 것이죠. ‘아, 인생이 원래 고통이구나. 내 삶을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과 확신을 주면서 말입니다. 다소 염세주의적인 것 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 경기 침체와 무한경쟁 구도, 각자도생이 일상화되어 버린 현시점에서는 현실적이고 유용한 조언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때 힐링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지금은 그 트렌드가 ‘혼자서도 잘 사는 법’에 관한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관점은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 심리학자, 정신의학자들의 세계관이나 종교적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생로병사의 4가지 고통과 여기에 정신적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 만나고 싶지 않은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와 오음성고(五陰盛苦-인간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5가지 요소. 인간이 겪는 고통의 총체적인 모습을 더한 8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 사상가, 작가, 강연가인 M. 스캇 펙(Morgan Scott Peck)은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삶이란 기본적으로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쉬운 길로 가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직면하는 것과 자기성찰, 개인의 선택, 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심리상담을 통해 만난 다양한 내담자들의 사례를 통해 정신질환에 맞서 치료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가진 의지와 잠재력, 영적 성장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이처럼 인생 자체가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며,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힘든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조금 더 행복해야 할 것 같은, 덤덤하고 무던하게, 씩씩하고 당차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부담감과 강박으로부터 해방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과 낙관주의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어쩌면 피로감과 열패감에 시달렸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할 수 있다고, 힘을 내라고 하는데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은 내 모습을 바라보며 어딘가 부족한 사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부적절감에 시달렸던 것이죠.
그러면서도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과 부담을 동시에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노력이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든 일들이 닥쳐오거나, 환경적 제약이 있을 때는 이런 관점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개인의 책임으로 결부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 힘든 게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누구나 인생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단순한 진리, 그럼에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무게중심을 두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잃어버린 삶의 방향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생이 항상 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지 않을까 합니다. 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주어진 상황에 때로는 순응하고 적응하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 그저 성실하고 꾸준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지만, 지금 서 있는 이 길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마주하고 용기 있게 걸어갈 때, 각자 자신만의 인생길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