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삶, 충만한 죽음
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며 살고 있나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가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예기치 못하게 갑작스럽거나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고, 건강하게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고 이 세상과 작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질, 삶의 의미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한참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웰빙은 행복하고 삶에 만족하면서 잘 사는 것, 질병이 없는 삶 등을 뜻하며 ‘안녕감’으로도 표현됩니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 자족할 수 있는 삶은 아마 누구나 꿈꾸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웰빙 뿐만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웰다잉은 좁은 의미에서는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 죽음의 과정을 잘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협의의 웰다잉 관점에서는 주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년기에 해당하는 분들이나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앞둔 분들, 그 가족분들이 죽음을 잘 준비하고 지나온 삶의 의미를 돌아보며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때의 웰다잉은 주로 연명치료, 존엄사, 호스피스 병동을 비롯한 관련 지원체계의 필요성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연결됩니다.
특히 요즘은 존엄한 죽음의 권리를 둘러싸고 안락사를 위한 법률 제정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안락사는 결정 주체에 따라서 1) 환자 본인이 죽음을 인식하고 안락사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발적 안락사, 2) 환자가 결정 능력이 있지만 환자 외 주변 사람이 결정하는 반자발적 안락사, 3) 혼수상태, 치매와 같이 환자가 죽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안락사가 결정되는 비자발적 안락사가 있습니다.
유발 방법에 따라서는 적극적 안락사, 조력자살,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됩니다. 1) 적극적 안락사는 약물 투여를 비롯한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죽음을 유발하는 것, 2) 조력자살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3)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이 진행되는 것을 저지하거나 늦추는 방법이 있지만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사망 시기를 앞당기는 것으로 연명치료 중단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는 의사 조력자살 모두 불법이며, 다만 2018년부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사용 등을 통해 임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것만 합법화된 상태입니다.
관련하여 2022년 5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말기 환자들의 의사 조력 자살(조력존엄사)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습니다. 이 법안 발의 이후 말기 환자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찬성하는 측과, 반대로 어떤 방법의 안락사든 합법화될 수 없다고 보는 반대측, 이러한 법안 추진 이전에 호스피스 지원 대상 확대 등 안락사가 아닌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제도적 지원 마련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 등 다양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안락사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는 까닭은 죽음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 결정 주체, 방법론 등에 있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나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입니다. 또, 신의 영역이라 여겨져 왔던 생과 사를 결정지을 권한을 넘나드는 것에 대한 부담이나 거부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웰다잉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만 아니라 삶의 전 과정에서 삶의 유한성, 죽음의 근접성을 인식하며 이를 통해 삶을 더 의미 있고 풍성한 것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이때의 웰다잉 개념은 의학적 상태에서의 죽음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과 같은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을 내포합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사실은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언젠가 삶이 우리를 죽음 앞에 데려다 놓을 것이기에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죠. 특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는 그가 없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가 떠났음에도 여전히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덧없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삶에 더욱 충실하고 주어진 현재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게 하는 동력을 제공합니다. 언젠가 끝이 있는 삶이기에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선물과 그 시간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더욱 집중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것인지, 내 삶의 끝나고 난 후 나라는 사람과 내 삶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를 생각하며 삶의 방향성을 다시 다질 수 있게 합니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시간과 자원을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더 현명하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옆에 있음을 기억할 때 비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삶에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것들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망설였거나 두려워했던 일들에 도전하기도 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피해야 할 것, 두려운 것이 아닌 평생 함께하며 언젠가 마주하게 될 동행자로 여길 때, 우리는 온전히 충만한 삶, 충만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웰빙과 웰다잉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삶을 보다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