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마음, 저장 장애
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봄을 맞이하며 대청소를 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청소할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옷장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옷가지들, 베란다나 창고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물건들을 정리할 때면 뻔히 안 쓰는 물건인 줄 알면서도 참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 꼭 쓰게 될 것 같고, 어떤 물건은 선물 받은 것이라서,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서, 비싸게 산 물건이라서 등등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정리하려고 했던 애초의 계획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늘도 옷장, 베란다, 창고에는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신박한 정리>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이렇게 물건 버리기나 정리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고, 집안을 새롭게 꾸며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의뢰인으로 나온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물건을 버리기 어려워하는 특징이 있었는데요. 그런 의뢰인들을 위해 전문가는 해당 물건의 사진을 찍어서 기념하고 물건은 버리거나, 의미 있고 정말 소중한 것들 몇 개만 남겨 놓고 다른 물건은 처분하게 하는 방법을 권유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물건 버리기나 정리를 어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저장하는 습관이 너무 심해서 집을 비롯한 생활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그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 대인관계, 직업생활에서의 어려움 등을 유발할 때는 전문적인 진단과 개입이 요구됩니다.
정신질환 진단 통계편람의 최신판인 DSM-5에서는 이를 ‘저장 장애(hoarding disorder)로 분류합니다. 저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 오래된 물건, 쓰레기에 가까운 물건 등을 계속해서 저장하며 ‘언젠가 쓸 날이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버리지 못합니다. 저장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거나 저장한 물건을 주변에서 처분하려고 하면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아마 뉴스나 방송을 통해 집안에 온통 잡동사니들을 잔뜩 쌓아 놓은 채 발 디딜 틈 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신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런 물건을 왜 계속 모아 두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고, 온 집을 가득 채운 물건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히기도 합니다.
저장 장애의 원인으로는 뇌에서 의사결정과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이상으로 인해 필요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의 구분에 대한 어려움, 우울장애나 불안장애, 조현병과 같은 다른 정신질환으로 인한 영향,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에서도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부족, 애착의 문제나 외상으로 인한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저장 장애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애로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울이나 불안장애, 조현병 등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럴 때는 해당 장애들에 대한 치료가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장 장애와 조현병의 망상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면 물건 수집에 관한 망상을 함께 다루어야 저장 행위를 궁극적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저장 장애가 우울증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 대인관계 위축으로 인한 정서적 결핍을 채우는 방편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접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장 장애는 인구의 2~5%에서 발생하는 정신질환으로서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며, 그로 인한 학업, 직업, 대인관계, 건강상의 어려움과 같이 가시적인 문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라고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장 장애가 심해지면 비위생적이고 불안정한 환경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위험, 더러운 집이나 생활 장소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대인관계를 피하고 고립되는 생활과 같은 문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저장 장애의 일종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물을 무분별하게 사육하면서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시키는 경우 동물 저장(animal hoarding)에 해당합니다. 동물 저장은 위생, 영양 공급, 사육 환경 등을 적절히 제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동물 사육을 포기하지 않으며 과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본인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삶을 위협합니다.
저장 장애의 치료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항우울제인 세로토닌 재흡수억제제를 통한 약물치료, 저장에 대한 왜곡된 신념을 바꾸고 행동 교정을 중재하는 인지행동치료, 상담 치료적 접근이 활용됩니다. 이때 저장 장애를 나타내는 당사자가 치료를 거부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통해 치료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불어 고령, 낮은 사회경제적 위치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사회복지사, 지역사회 안전망 등을 통한 실제적인 도움이 함께 제공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장 장애는 물건을 모은다는 점에서 ‘수집(collecting)’과 유사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집은 의미 있고 소중한 물건들을 모으는 행위인 데 반해 저장 장애는 무가치하고 전혀 쓸모나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무작위적으로 모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행동이나 마음이 수집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저장 행위에 더 가까운지 한번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어지럽게 집안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용기 내서 비워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비워지고 깨끗해진 집안만큼이나 여러분들의 마음도 정돈되고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