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아동기 경험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

2024-01-08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어린 시절에 여러분은 행복한 아이였나요?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위축되고 우울한 감정을 많이 느끼는 아이였나요? 매일매일 즐겁고 잠자리에 들 때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따뜻한 유년기를 보내셨나요? 안타깝게도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많고, 어린 나이임에도 사는 게 힘들게만 느껴지셨나요? 여러분의 기억 속 유년 시절은 어떠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세상에 어린 시절을 겪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텐데요,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겠지만, 때때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때로 돌아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비록, 유년기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우리를 그 시간, 그곳으로 데려가곤 하죠. 

여러분께서 떠올리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 늘 그러하듯, 우리의 어린 시절도 항상 기분 좋고 긍정적인 경험만 있을 수만은 없었을 텐데요,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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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밥 안다(Bob Anda) 박사와 빈스 펠리티(Vince Felitti) 박사가 실시한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ACE Study)’에서는 18세가 되기 이전의 아동이 다음에 제시된 항목을 경험하거나 가정 내 환경에 노출된 경우에, 즉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 신체적·정서적 방임, 가정 내 약물 남용 문제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경우, 어머니가 폭력을 당한 경우,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가족이 범죄 행위에 연루된 경우 등 10가지 항목 중 한 가지 항목에 해당할 때마다 1점씩 채점하도록 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10가지 항목에 모두 해당될 때 가장 높은 점수인 10점이 채점되는데요, 안다 박사와 펠리티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과 나쁜 건강 상태 사이에 ‘용량-반응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ACE 지수가 높을수록 건강에 대한 위험도가 크다는 의미로, ACE 점수가 4점 이상인 사람은 ACE 점수가 0점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 자가면역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2배, 만성폐쇄성폐질환에 걸릴 확률은 3.5배나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ACE 점수가 7점 이상인 사람은 폐암에 걸릴 가능성은 3배, 허혈성 심장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3.5배나 높다고 합니다. 게다가 ACE 점수가 4점 이상인 사람이 학습 및 행동 문제에 진단을 받을 가능성은 32.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뇌 발달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특히, 이 연구는 가난이나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거나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지역의 주민들이 아닌,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누리고 있는 샌디에이고 지역의 중산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라는 점에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질병을 일으키는 위험 요인이라는 사실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성인기의 나쁜 생활 습관이나 행동,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또한 이후에 행해진 많은 후속 연구들도 펠리티 박사의 ACE 연구가 옳았음을 입증하며 그의 연구에 무게감을 실어 주고 있죠.

안타까운 것은, 많은 아동들이 이러한 부정적 경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최초의 ACE 연구 발표 이래로 미국은 39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 주민의 ACE 데이터를 취합한 결과, 인구의 55~62%가 아동기이 부정적 경험을 최소 한 가지 이상 했고, 네 가지 이상이라고 응답한 응답자는 13~1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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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인해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우리의 신체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까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워낙 복잡하고, 개개인마다 지니는 생물학적 특성과 정신 구조, 역동이 다양하지만,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아동기에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부정적 경험 요인에 많이 노출될수록 우리의 몸은 이를 위협으로 감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 만약 한 아동이 가정에서 학대에 노출되었다면, 이 아동의 편도체(뇌의 공포 중추)는 즉각적으로 뇌에 위험 신호를 보내고, 뇌는 교감신경-부신수질 축과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을 활성화해 투쟁-도피 반응을 보이게 되죠. 이때 아드레날린이나 코르티솔 같은 갖가지 스트레스 호르몬이 방출되면서 우리의 신체 기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요약하면, 너무 강한 스트레스에 빈번히 노출되면서 우리 몸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조절 장애 상태(일명 ‘유독성 스트레스’ 상태)가 되고, 이로 인해 우리의 뇌 구조는 물론 신경계, 호르몬계, 그 밖에 다른 신체 기능과 내분비계, 면역계에까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가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약 여러분 중에, 혹은 여러분의 가족이나 아끼는 지인 중에 부정적인 아동기 경험이 많은 분이 계시다면, 혹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조절 장애 상태는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유독성 스트레스를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 유독성 스트레스를 퇴치하는 데 어느 정도 검증되고 추천할 만한 방법으로는 규칙적인 운동과 좋은 식습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운동은 스트레스 반응 조절에 도움을 주고, 염증 물질인 사이토카인도 줄여 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기름기가 많고 자극적인 음식보다 섬유소가 풍부한 과일이나 채소, 통곡물과 좋은 단백질 위주로 식사하는 습관 역시 몸속의 염증을 줄여 주고 뇌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또한 명상이나 요가와 같은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절 자애 상태에 놓인 스트레스 반응 체계의 균형을 되찾는 데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변의 지지적인 가족이나 좋은 사람들과 친밀감을 나누고 긍정적인 교류를 하는 것 역시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죠.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슴 아픈 일이나 불행한 기억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다시 마주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 아동기 경험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외면하거나 의식하지 않도록 수면 아래 머물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유독성 스트레스에 그대로 노출되도록 방치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도 잊히지 않는 부정적 아동기 경험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부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참고문헌]

1. 정지인 역(2019).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심심

2. Vincent J. Felitti(2002). “Belastungen in der Kindheit und Gesundheitim Erwachsenenalter: die Verwandlung von Gold in Blei”, Zeitschrift fur psychosomatische Medizin und Psychotherapie,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