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부탁할 수 있고, 나는 거절할 수 있다
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유독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다른 사람이 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해주다 오히려 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곤란했던 경험 있으신가요? 혹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하는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답답하거나 억울한 적 있으신가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거절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통 거절을 할 경우 상대와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으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이 정도 부탁을 들어주면 나중에 나의 부탁도 들어줄 수 있으니 한 번 해 주자.'라는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죠. 이렇게 상대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한두 번이 아니라 해당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본인의 삶에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 중 일을 같이 해 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해주다 정작 본인의 업무는 시간 내에 하지 못하거나 낮은 퀄리티로 제출하여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고 낮아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절을 잘 하는 것 또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대인관계에서 건강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절 또한 잘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어떠한 요청이나 부탁을 받았을 때 자신의 감정을 파악한 뒤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역량이나 한계 밖의 요청에 대해서는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거절하는 연습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을 때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거절할 권리가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사결정권이야말로 자기 존엄성의 핵심이며, 건강한 경계의 중요한 기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사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부당한 상황에 대해 거절해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바로 나타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므로 거절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 가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부탁할 수 있고, 상대는 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내 선택의 문제이며, 나의 부탁의 거절 유무는 상대의 선택이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 가짐이 형성되었다면, 실제 거절 의사를 보일 차례입니다. 거절을 할 때는 부드러우면서도 정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시간 여유를 두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탁을 받았는데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긴다면 일단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멈춥니다.
다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는 안 되며, 그날 중으로 대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 정중하면서도 명료하게 거정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의 요청에 비판단적인 태도를 보이며 내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초점을 두어 행동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상대의 요청에 대해 전부 들어줄 수는 없지만 일부는 들어줄 수도 있다는 유연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유독 거절을 하는 데 있어 높은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면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내향적이거나 순응적인 사람일수록 거절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느끼며 일명 ‘착한 아이 증후군’이 있는 사람도 거절을 힘들어합니다.
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쌓이고, 그 결과 자신의 정신건강과 인간관계를 동시에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방법을 활용하여 거절 연습을 해보고, 부당한 요구는 당당하게 거절해 보시기 바랍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
[참고문헌] 김혜원, 원성두, & 김은정. (2022). 거절민감성이 대인관계문제에 미치는 영향: 분노표현양식의 조절효과. 한국심리학회지: 임상심리 연구와 실제, 8(1), 9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