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이별 후 무기력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요
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0대 중반 여성입니다. 저는 재작년에 처음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연락하고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과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연애를 시작하기 몇 달 전 우울증으로 심하게 고생했던 기간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항상 삶에 뭔가 결핍된 느낌이 들었고 우울한 이유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친구나 가족이 주는 정서적 지지와는 별개로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고, 제 삶에서 결핍되었던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애인과 일상을 공유하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부여이자 원동력이 되었고, 연애를 하며 자존감도 높아지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더욱 원만해졌습니다.
그런데 약 일 년간의 교제 후 애인이 마음이 식었다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하였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제가 저 자신보다 좋아하고 깊은 정을 주던 사람이 한순간에 곁에 없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몇 번 새로운 만남을 가져 보았지만 별 감정이 들지 않았고,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연애를 할 때는 애인에게 사랑받는 것과 그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지금은 제가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동기를 못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꼭 해야 할 일(논문 작성 등)도 자꾸 미루게 되고, 순간의 재미를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회성 글을 읽거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연애를 할 때 느꼈던 열정과 행복감을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니 무기력하고 집 밖을 나가는 것도 회피하게 됩니다. 또한 제 커리어나 미래에 관한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잠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니 무기력한 습관이 고착화될까 봐 두렵습니다.
떠난 인연을 억지로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고, 혼자인 상황에서도 일상에 동기부여를 얻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도 의욕 있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을까요? 전문가 분들께서 조언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반갑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에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원동력을 상실하고, 무기력감이 지속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우리에게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소중한 관계, 사랑하는 존재라는 확신을 받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 이를테면 존재론적인 열등감과 불안감, 두려움, 허기와 갈등, 의존하고 싶은 욕구와 같은 결핍감을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 채우기를 바라며, 때로는 기대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수용받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으며, 이 사랑이 영원히 지속돼서 나의 불안과 공허감, 결핍감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갈망은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욕구이자 감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망이 너무도 강렬하거나 자신의 인생에서 거의 전부가 될 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지면서 오히려 사랑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또 사랑이라는 감정도 고정불변의 것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실제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말인데요, 영국의 과학자들이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인간의 뇌를 촬영해 본 결과,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의 활동이 멈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또 사랑에 관여하는 일명 콩깍지 호르몬인 도파민, 엔도르핀,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과 같은 호르몬들이 분비되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을 때는 상대방의 실체나 서로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놔두지 않습니다. 길어야 2, 3년 정도가 지나면 멈춰 있던 비판 기능도 다시 제 기능을 하게 되고, 사랑의 호르몬도 이제 평소 수준으로 떨어져서 사랑이 식었다는 느낌을 받거나 권태기가 오는 등 위기를 겪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처럼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에 관여하는 호르몬의 작용이 훨씬 더 짧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이처럼 사랑에 빠진 순간에 느끼는 기쁨과 환희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사람이나 관계도, 또 사랑을 포함한 사람의 감정도 관계의 역동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늘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어쩌면 사랑의 권태로움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변화된 관계의 국면을 받아들이고 서로 맞춰 나갈 때 관계는 성숙해지고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별을 맞이하거나 상처받을지도 모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또 깊은 정을 줄 수 있었던 사연자님께서는 참으로 용기 있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사랑을 시작조차 못하거나,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있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상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도 반응입니다. 상실에 대한 애도 반응은 사람마다 그 반응이나 변화 양상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흔히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이별한 후에 이토록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진심으로 상대를 열렬히 사랑했고, 사연자님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비록 이번 연애는 이별로 끝이 났지만, 그것이 기나긴 사연자님의 인생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인연과 사랑까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이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나간 사랑을 충분히 그리워하며 애도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별의 고통을 너무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것은 상실을 직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연애를 할 때는 ‘애인에게 사랑받는 것’과 ‘그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연자님께 묻고 싶습니다.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을 만나기 이전에, 사연자님께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요. 그때는 어떠한 인생의 목표와 즐거움이 있으셨는지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연으로 인해 사연자님 인생의 원동력을 상실했다고 하는 것은 비단 ‘실연’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 거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도, 사연자님께서 일상에서 소소하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꼈던 일들을 기억해 내고,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몸을 움직여서 실행해 보신다면 어떨까요. 하루에 한 번, 짧게라도 산책하며 햇살과 바람을 느껴 보기,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고 빠르게 뛰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껴 보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감상하기(슬픈 이별 영화나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어도 좋겠지요), 실컷 자고 일어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오늘 목표로 한 논문 작성을 마무리하기 등등.
아직은 실연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에너지 소모가 심하고, 더 많은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은 우리의 뇌 판단 능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해야 할 일이나 과제를 하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지고, 실수할 여지도 생겨납니다. 따라서 이럴 때는 뭔가를 미루거나 해내지 못한 데 대해 자신을 압박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아직은 사연자님의 몸과 마음에 휴식과 여유가 좀 더 필요한 때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여유, 일상의 작은 즐거움과 행복을 차차 되찾으면서 해야 할 일은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시도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누군가와 사랑했던 시간도 물론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지만, 결국 떠나간 사람은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인생을 재건하고, 소중한 나의 일상을 꾸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사연자님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사연자님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요.
만약 이러한 마음가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계속해서 무기력감이 심한 상태가 이어진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시어 전문가와 좀 더 전문적인 상담을 받아 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일전에 우울증으로 심하게 고생했던 기간이 있으셨다고 하니 말이죠.
마지막으로,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진실이 담긴 그 말,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실연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의 밀물이 서서히 썰물로 빠져나가면, 다시금 사연자님의 일상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날이 올 것임을 믿으며, 이만 답변글을 마치려 합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