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언제쯤 안 죽고 싶고 안 힘들어질까요?

2023-11-16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 직장인입니다. 언제쯤 안 죽고 싶어지고 안 힘들어질지 고민이 되어서 사연을 올립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일단 생각나는 것부터 정리하여 글을 쓸게요. 유치원 때 제가 생각나는 기억은 어머니에게 혼나서 울고 있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제가 왕따를 심하게 당해서, 왕따를 당한 기억은 분명 있는데 마치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 놓은 것처럼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누군가 나를 죽여 줬으면 좋겠고, 한편으로는 구원해 줬으면 좋겠고, 늘 찢어질 듯 괴롭고 죽고 싶었지만 ‘언젠가는 끝나겠지.’라는 기억밖에는 없네요. 

20대 초·중반도 똑같습니다. 지독하게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저 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자식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매번 형제자매와 비교되면서 자랐고, 딱히 무언가를 안 해도 사랑받는 형제자매에 비해, 저는 가치가 있어야지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치 있는 아이가 되어야만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살이 찌면 쓰레기 같은 자식이 되어 ‘살만 빼면 끝나겠지.’ 싶었고, ‘공부를 잘해야지 너는 사람 취급받는다.’는 말에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그렇게 저의 모든 인생의 순간은 숨이 막힌 채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야지 행복해진다고 배웠습니다. 이제는 결혼을 하랍니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습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라고 할 테고, 그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끔찍합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요? 저는 언제 괜찮아지고, 언제 행복해지는 거죠? 하라는 대로 하라고… 부모님께 맞고 쌍욕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근데 그렇게 원하는 대로 했는데, 왜 저는 안 행복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럽니다. 너같이 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왜 독립을 안 하느냐고요. 모두 저를 비난만 합니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는데 늘 똑같습니다. 왜 저는 어린 일곱 살 아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왜 저는 누군가 저를 죽여 주기를 아직도 바라는 걸까요? 저는 언제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걸까요?

부모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하니, “네가 아직도 세상을 잘 모르는 거고, 원래 인생이 그런 거다.”라고 합니다. 듣기 싫으니 과거 이야기는 하지도 말고, 징징거리지 말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터놓으면, 제가 등신이고 미련하다고 합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요? 늘 불안함에 시달리고, 불면증도 심해져 이제는 삶이 너무 지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주신 고민글 찬찬히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20대 후반 직장인으로, 인생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심적으로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상황이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이렇게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해 보기 위해 현재의 인생에서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유년기부터 아동기, 그리고 청소년기까지 기억을 복기해 보고 또 오프라인이지만 이렇게 상담까지 신청해 주신 것 등 정말로 용기 있는 시도와 과정이라고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죽을 만큼 힘든 상황 속에서도 괴로움을 피하고자 무작정 덮어 두거나 문제를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직면하고 이해하며 극복하기 위해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를 쥐어짜서라도 치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으신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행위와 시도 자체가 사연자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내린 주체적이고 중요한 결단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사연자님께서 기억하시는 유년기 시절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나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혼나서 울고 있는 장면만 깊게 각인되신 것만 같아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이어진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 경험은 또 얼마나 외롭운 투쟁이었을까요. 그 시절의 기억이 마치 파편화된 조각처럼 의식 위로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차마 지금이라도 그것을 대면하기에는 너무나 두렵고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하물며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집에서조차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거나 에너지를 회복하고 가족들에게 위로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사연자님의 심정이 오죽 답답하셨을까 싶습니다. 다른 형제자매와 늘 비교당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사랑받기보다는 항상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인정받는다거나 조금만 실수하거나 잘못하기라도 하면 폭언과 욕설, 체벌이 가해지는 환경 속에서 얼마나 불안감에 떨며 숨죽이는 생활을 해 오셨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사연자님께서 지금껏 고달프고 힘든 와중에도 꿋꿋이 학업을 마치고, 또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사회생활을 이어 가고 계신 점이 참으로 대견하고, 그동안 너무도 고생이 많으셨다는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진_ freepik

어린 시절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폭언이나 욕설, 형제간의 심한 비교나 체벌 등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면, 그것은 자녀를 향해 가해지는 가정 폭력이자 아동학대로밖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오랫동안 왕따를 당했던 일들까지, 어린 사연자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생명의 위협이나 그에 준하는 강한 스트레스는 정신적 외상(trauma)을 유발하며, 그것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치유되지 못했을 때, 성인이 이후에도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 행동에까지 다양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만성적인 허무감이나 우울감,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 긴장감과 초조감, 무기력감, 무감동성 성격 등등 우리의 정서적 · 사회적 · 관계적 측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증상들, 즉 트라우마를 일상 중에 혹은 꿈을 통해 재경험하고, 트라우마를 떠올릴 만한 행동, 장소, 사고를 회피하며, 이에 따른 과도한 경각심, 부정적인 정서(우울, 불안 등등)를 경험할 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로 진단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장기적으로, 특히 어렸을 때 만성적이고 반복적인 정신적 외상을 겪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PTSD와는 다른 양상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키게 되는데, 심각한 PTSD에 해당하는 ‘복합 PTSD(Complex PTSD)’라고도 명명하며, 다음과 같은 증상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큽니다(허먼, 1992).

 

1. 감정(정서)과 충동 조절의 극심한 변화 - 만성적 정서 조절의 곤란, 분노 조절의 어려움, 자기 파괴적이거나 자살을 시도함, 성적 관계 조정의 어려움, 충동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들

2. 주의 또는 의식의 변화 - 기억상실증, 일시적인 해리 삽화(단기간의 해리 증상), 이인증

3. 신체화(신체로 외상을 드러내는 방식) - 소화기 계통의 문제, 만성 통증, 심폐 기관의 증상, 전환 증상(심리적 문제가 신체적 증상으로 전환되는 것), 성적인 증상, 공황

4. 자기 지각(스스로를 보는 방식)의 변화 - 만성적 죄책감, 수치심, 자기 비난, 자신이 영원히 상처받았다는 느낌, 무력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자기 인생에서 외상적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시킴

5. 가해자에 대한 지각 변화 - 자신이나 타인, 실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가해자의 왜곡된 신념을 받아들임, 가해자에 대한 이상화, 가해자를 괴롭히는 데 집착함

6. 대인관계의 변화 불신감, 자기 자신을 재희생시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킴

7. 의미 체계(삶, 타인, 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 좌절감 및 절망감,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들을 상실함

 

어떠신가요? 앞서 제시된 목록 중 사연자님께 해당하는 증상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사연에 적어 주신 내용을 참조해 보면, 1. 감정과 충동 조절의 극심한 변화, 2. 주의 또는 의식의 변화, 4. 자기 지각의 변화, 6. 대인관계의 변화, 7. 의미 체계의 변화 등의 어려움을 겪고 계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사연자님께서 겪고 계시는 심리적 증상이나 어려움은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정확한 진단이나 평가가 가능하며, 만약 PTSD로 진단될 경우에는 전문가에 의해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실 것을 권유드리는 바입니다.

트라우마 치료는 대부분 환자가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안전한 환경에서 믿을 만한 대상과 함께 오래된 상처에 대해 치유하고 애도하는 것이 치료의 주된 과정입니다. 이러한 작업과 동시에 내담자가 학대의 ‘희생자’로서 남는 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오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낼 내적인 힘을 지닌 ‘생존자’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최근 들어 과거의 상처나 현재에도 지속되는 마음속 괴로움과 고민 등을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소통의 시도는 나름의 의미가 있고, 또한 참으로 용기 있는 행위이자 자기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답변이나 위로가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사연자님께 힘이 되거나 지지해 줄 만한 역량이나 의지가 없다는 다소 씁쓸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 나름의 수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그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기대거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죠. 

이제부터는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 강요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의 가치관과 나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사연자님의 인생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앞으로는 사연자님의 고민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턱대고 질타하거나 부정적인 시선과 말로 사연자님의 사기와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사람들, 사연자님 대한 예의와 존중감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연자님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락하지 마세요. 그 대신 사연자님의 장점을 인정해 주고,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며,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점차 그런 분들이 사연자님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힘써 보세요.

 

사연자님께서는 아직도 ‘어린 일곱 살 아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하셨지만,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기에 모든 감정을 억압하고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이 사연자님께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사연자님은 성장했고 능력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연자님의 트라우마와 불안, 불면증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해 주고, 상처받은 마음을 안정된 환경과 대상에서 다루어 줄 전문가와 함께 치유의 여정을 시작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전문가와의 상담과 더불어, 일상에서도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줄 여러 관련 콘텐츠나 동영상, 서적 등을 꾸준히 보면서 스스로에게 긍정의 말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들려주는 연습도 함께 실천해 보세요. 

이렇게 전문가의 도움을 바탕으로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긍정의 말을 들려준다면, 비록 그날이 조금 더디게 오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치유의 빛이 사연자님을 비추는 날이 올 거라 확신합니다. 사연자님께 치유의 빛이 비추는 그날이 곧 오기를 바라 봅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