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게이에 대한 강박적 생각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중학교 때 왕따와 학교폭력을 당해 강박증과 우울증이 심하게 생긴 사람입니다. 요새 저의 고민은 강박증도 강박증이지만, 최근 6~7년 동안 ‘나는 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 불안해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더 심해져서 ‘게이는 절대 안 돼. 내가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게이가 맞나?’ 이런 생각이 진행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게이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어디에 나가기도 싫고 우울증까지 생겼습니다. ‘게이로 살 수도 없고, 또 이딴 생각에 만 매달릴 수도 없고….’ 그래서 저의 과거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여자 친구도 있었습니다. 스킨십, 그런 건 없었지만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왕따에 시달리면서 사춘기도 멈춰 버리고, 온갖 강박증과 불안에만 시달려 살았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싫어서 억누르고 불안을 줄이는 데만 신경 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욕도 하면 절대 안 돼.’, ‘사춘기 때 몰래 보는 성인 동영상도 절대 보면 안 돼.’처럼 온갖 강박적 생각 속에서 살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떤 생각 틀에 갇힌 듯이 살았지요.
지금은 나이가 39세가 됐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본 게 다이고, 지금껏 여성과 진한 스킨십 한 번 해 본 적이 없어서 게이에 대한 의심이 더해 갑니다. 상담 좀 요청합니다. 도와주세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자신이 게이(gay, 동성애자 중에서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절대로 게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수년간 사로잡혀 살아오시는 동안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오셨을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된 원인을 사연자님 나름대로 밝혀 보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본 결과,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왕따와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아픈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사건으로 인해 사춘기 때 확립됐어야 할 자아 정체성이나 성적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 오랫동안 혼란을 겪는 것으로 추측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사춘기는 청소년이 아동기를 벗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처럼 통합적인 자기상을 정립해 나가며 정체감을 확립하는 시기입니다. 또 생물학적으로는 2차 성징이 일어나면서 보통은 마음에 드는 이성에 대해 관심이 많이 생기면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하지만, 사춘기 특성상 일시적으로 동성에 대한 호감이 생기거나,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죠.
이렇게 인생의 발달단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인 사춘기 때 친구들로부터 왕따와 학교폭력을 당했던 경험은 사연자님께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큰 충격과 상흔을 남겼으리라 짐작됩니다. 왕따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은 사람에 따라, 각각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그 범위나 양상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일 수 있는 사안은 바로,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왕따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거나 다가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고, 다행히 누군가와 어느 정도 친밀해졌다 해도 온전히 그 사람을 신뢰하거나 동등하게 관계를 맺는 법, 관계에서 발생되는 긴장감이나 불안감 등을 다루는 데 문제가 생겨서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기도 하죠.
이렇게 어렵사리 타인과 맺은 관계에서 또다시 상처를 받거나 좋지 않게 관계가 끝나는 경험이 반복되면, 점점 더 타인에게 호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마음을 열거나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경계하거나 부적응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게 됩니다.
사연상에는 중학교 시절의 왕따 경험이나 ‘게이’에 대한 강박적 생각 외에 가정환경이나 부모님과의 관계, 생애 전반에 걸쳐 친구 관계나 사회생활에서의 관계, 직장이나 일과 같은 다른 정보들이 나와 있지 않아 사연자님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연결되는 답변을 드리기는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기서는 사연상 사연자님께서 밝혀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연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사연자님께서 실제로 스스로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연상에는 밝히지 않은, ‘스스로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지할 만한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있으신지는 알 수 없으나 사연상의 내용만으로는 사연자님께서 정말로 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연자님께서 추측하신 대로 중학교 1학년 때 잠깐 여자 친구를 만났던 경험 이후에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결혼 적령기가 무르익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이성 교제나 성적 경험이 없었던 것이 이러한 의심과 강박적 사고를 점점 더 키워 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밖에 중학교 시절 왕따를 경험할 당시 성적인 모욕감을 느낄 만한 언사나 괴롭힘이 있었다면, 지금 사연자님께서 느끼시는 성적 정체감의 혼란감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게이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 역시 아마도 오래전부터 사연자님께 있어 왔던 강박증이나 강박사고의 내용이 최근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그 주제가 사연자님의 성적 정체성이나 이성 교제와 관련한 주제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정말로 사연자님께서 느끼시는 성적 정체감에 대한 혼란의 문제인지, 아니면 강박사고의 일환인지 먼저 구분해 내고, 그에 따른 해결 방안을 찾아 해결 및 치료적 접근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연상 내용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후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일단 제안드리고 싶은 것은 사연자님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해 보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는 사춘기 시절부터 유예되어 왔던 과업을 뒤늦게나마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적 취향을 아는 것은 단순히 사춘기나 청년기 시절의 과업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기도 하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사연자님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확립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관심이 가는 이성이 있는지 살펴보고 호감을 표시하면서 관계를 진전시켜 보거나, 이것이 쉽지 않으면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성을 소개받는 방법도 있겠죠. 이 또한 여의치 않다면, 이성을 만날 수 있는 동호회나 소개팅 앱을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양한 경로로 이성과의 만남을 시도해 보면서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하고, 성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시간을 가지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사연자님께서 현재 이렇게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사고나 신념들을 현실을 통해 검증해 볼 만한 내적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해결책이 없다는 생각에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연자님께서 사연에 적어 주신 내용을 보면, 어디에 나가기도 싫고, 우울증까지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또 왕따와 학교폭력을 당한 이후로 오랫동안 강박증을 앓아 오셨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동안 우울증과 강박증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 오신 건지 궁금합니다. 우울증과 강박증이 만성화될 경우 많은 정신적 고통과 생활에 어려움이 발생될 수 있고, 장기적인 치료가 요구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강박증과 우울증의 전문적인 치료 및 상담을 받아 보시면서 수년간 반복된 게이에 대한 강박사고도 함께 다루어 보신다면 어떨까요.
마지막으로, 사연자님께서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기준이나 잣대를 들이대고 있고, 그것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검토해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해서는 안 돼.’, ‘나는 △△해서도 안 돼.’와 같이 너무 많은 자기 검열과 억제는 눈앞의 불안을 잠재우는 듯해도 무의식적 불안을 더 많이 유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욕 좀 하면 어떻고, 성인이니 성인 동영상 좀 보면 어떻습니까.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기준을 점점 느슨하고 넓혀 가셔서 자신과 타인, 세상과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시는 삶으로 변화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