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2023-09-06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서울에서 부모님 사업 때문에 시골 골짜기로 이사 와서 초등학교 때부터 20대까지 살다가 현재는 저만 따로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때 괴롭힘으로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정말 심하게 괴롭힘 당해 현재까지도 곱씹어 생각나고,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를 다닐 때 노골적인 무시와 망신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싶어도 저도 모르게 생각이 나서 괴롭습니다.

전 현재 경제적으로 바닥이고, 정신적·신체적 건강도 너무 많이 안 좋은데, 가해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좋은 직장, 높은 월급도 모자라 부잣집에 시집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국내외로 여행이나 맛 집을 다니더군요. 

전 지속된 실패로 인해 체력도 더 약해졌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눈뜨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 없이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도 합니다. 저도 계속 서울에 살았다면, 아니 수도권이나 도시다운 시에만 살았더라도 인생이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을 겁니다.

무능한 부모가 원망스럽습니다. 제가 힘듦을 토로할 때마다 무조건 참으라고만 하고, 참고 견디다 보면 나중에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상황만 더욱 악화되어 제 마음에는 깊은 상처만 남았습니다.

명절 때마다 집에 내려가기도 싫고, 효도를 강요받는 것도 짜증 납니다. 집에 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부 전화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음식을 한 트럭씩 챙겨 주어도 솔직히 하나도 안 고맙습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왜 저를 낳아서 나락으로 가게 했는지… 안 태어났으면 정말로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너무도 화가 납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문화생활을 다양하게 누렸던 제 또래의 사람들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전 사람 운도 없고, 재물 운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낙오자, 패배자, 실패자, 폐급 인간입니다.

이제 이런 제 삶에 너무나도 지칩니다.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용기 내어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사연자님의 사연을 읽으면서 그간 겪어 오신 여러 가지 힘든 일들로 인해 느끼셨을 깊은 좌절감, 인간에 대한 불신감과 적대감 등이 사연 속에 고스란히 녹아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창 시절 또래로부터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동료애를 느끼거나 선후배 간의 따듯한 정이나 의리를 경험하기보다 노골적인 무시나 망신을 당했던 아픈 기억들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른다고 하시니 마음의 고통이 상당하시리라 짐작됩니다.

더욱이 학창 시절 사연자님을 괴롭혔던 가해자는 잘못한 행위에 대한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거나 처벌도 받지 않은 채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연자님의 심정은 또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실까요. 어릴 때 봐 왔던 동화책 내용처럼 세상사에는 권선징악이 실현되지 않는 것 같고, 하필 왜 나 자신이 괴롭힘의 당사자가 되어야만 했는지 세상에 대한 배신감마저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반복되면서 현재로서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무기력감과 잠재된 분노가 축적되신 것 같아 몹시 안타깝습니다. 

특히, 사연자님께서 인생의 시련이 닥쳐 올 때마다 부모님께 상의하고 위로나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것과는 달리, 부모님께서는 “무조건 참으라고, 참고 견디다 보면 나중에는 괜찮아질 거야.”라고만 말씀하셨던 데 대한 서운함과 속상함이 꽤 깊은 마음의 상처로 남으신 듯합니다.

아마도 사연자님과 같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가장 가깝고, 또 나를 보호해 주리라 생각되는 부모님께 위로와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녀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깊은 공감이나 따뜻한 위로, 실질적인 도움이나 해결책을 제시해 줌으로써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 아닌, 무조건 참으라고만 하는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을 때 어쩌면 사연자님께서는 부모님께서 나의 ‘힘듦’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거나, 나의 ‘아픔’이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만 같아 좌절감과 원망감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사연자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만,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장에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그 방법을 몰랐기에 고통스러운 현재의 상황이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지나갈 것이니 조금만 버텨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또 자신들도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기에 당시에는 그 말밖에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셨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게 됩니다.

과거 사연자님께 일어났던 유감스러웠던 사건들은 안타깝게도 없었던 일이 될 수도, 또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답변글을 빌려 사연자님께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연자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정신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움직이신다면 분명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과 흔적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힘도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이곳에 힘들었던 본인의 이야기를 차분히 써 내려가고, 마음을 터놓는 사연자님의 행위 자체에서 사연자님께는 이미 변화하고 싶은 욕구와 잠재된 에너지가 있고, 치유를 향한 여정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답변글을 통해 사연자님께 꼭 전해드리고 싶은 몇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사연자님의 신체적 건강을 잘 돌보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많이 안 좋은 상황이라고 하시니 염려가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의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기 쉽고, 마음이 아프면 몸의 고통도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인 것이죠.

따라서 현재 영양 섭취는 잘하고 계신지, 수면의 질과 양은 적절히 유지하고 있는지,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운동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 체력 증진을 위해 개선하고 보완할 부분이 있다면 실천으로 옮겨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를테면 당장 거창한 운동은 아니더라도 사연자님께 맞는 운동을 찾아서 일주일에 몇 번만이라도 실행에 옮기고, 영양이나 수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관리를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는 과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애써 그 기억들을 외면하거나 억압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오랜 시간 그때의 힘들고 아픈 기억에 머물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는 오히려 생각보다 사연자님의 감정이나 몸에 집중해 보세요. 몸의 어느 부분이 유독 불편한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이때 복식호흡이나 반신욕, 요가와 같이 몸을 이완하면서 차차 그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이 인식되면 거기에 잠시 머물렀다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됩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잘 멈춰지지 않는다면, 사전에 시간을 정해 두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연습을 반복하시다 보면, 괴로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시간이나 간격, 그 강도가 점차 옅어지는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시간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중단하고 몸을 움직여 인식을 전환하거나 정신건강 전문의나 상담가와 함께 이 부분을 다루어 보는 방법도 추천드립니다.

 

사진_ freepik

덧붙여, 의도적으로라도 가해자의 소식이나 일상에는 거리를 두고 관심을 끊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해당 가해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현재 내 삶의 모습을 일일이 비교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해롭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의 기준을 세울 때는 타인이 아닌, 현재 나의 바람이나 욕구, 나의 모습, 나의 가치와 지향성 등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이나 모습을 향해 비록 느리더라도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사연자님께서 자라 온 성장 환경이 시골이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원치 않았던 부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도시가 시골에 비해 좀 더 교육의 기회가 많고, 문화적으로 누릴 만한 것들이 풍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골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결핍되었다거나 나쁘고, 도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좋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도시에서의 삶이 굉장히 피로하고 맞지 않는 반면에, 시골에서의 삶이 더 자연 친화적이고 여유롭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이죠. 다만, 사연자님께서는 시골보다는 도시의 삶이 더 본인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분이기에, 시골에서 성장한 과거의 시간에 대한 불만족감이 상당하셨던 듯합니다.

더욱이 ‘시골 = 무능력한 부모님, 결핍, 고통스러운 괴롭힘의 기억’과 같은 무의식적인 인식이 작동해 시골에 대한 악감정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태어날 때 부모님이나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어린아이였을 때 거주지를 결정하는 것은 성인인 부모님의 몫이라는 점에서, 사연자님에게만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기보다 보편적인 부분임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좌절감이나 우울감이 심할 때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느껴지며, 우리의 사고도 이분법적 사고나 왜곡된 사고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또 과거에 시선이 머물면서 후회와 통탄, 비탄하는 패턴에 함몰되기도 하죠. 

따라서 과거에서 시선을 거두어 현재와 미래로 시선을 돌려 오늘 일과 중 작은 기쁨이 있었던 순간, 감사하는 마음, 소소하게나마 실행하고 완수한 일들로부터 스스로에게 성취감과 좋은 에너지를 차차 쌓아 나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진_ freepik

사연자님께서는 본인의 선택과 의지로 현재 생활하시는 공간도 도시로 옮겨 오신 만큼, 도시에서 누리고 싶었던 문화생활이나 또 이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들도 조금씩 체험하고, 시도하신다면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 데 좋은 자극과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조금 정리되고 편안해질 때까지 당분간은 자식으로서 가지는 연락이나 효에 대한 의무감은 내려놓으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도 도저히 삶에 대한 의욕이나 에너지가 생기지 않거나, 모든 것들이 비관적으로만 느껴진다면,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소에 방문하시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사연자님께서 일상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인생의 지향성을 찾아 존재와 삶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