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버킷리스트가 없다는 것이 이상한 걸까요?

2023-07-30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40대 여성으로 결혼을 했고 아이가 한명 있으며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꽤 내성적인데 남편은 무척이나 외향적인 성격이에요. 저는 결혼 전부터 영화 보기 정도가 유일한 취미였고, 그 연장선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동호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직장 생활은 무리없이 잘하고 있고,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 간의 모임은 어느 정도 좋아합니다).

남편은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 많은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즐기며, 음악회나 연극 등의 공연도 좋아해서 시간을 내어 관람하고, 아이가 크면 피아노, 미술 등을 배우며 여가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남편에 비해 저는 집에 있는 것을 선호하고, 몇 날 며칠 집에서만 지내도 그리 답답하지 않아요.무엇보다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없습니다. 남들은 ‘○○에는 꼭 가 보고 싶다.’, ‘○○은 반드시 경험해 보고 싶다.’ 이런 버킷리스트가 있는 것 같던데, 저는 그런 게 없습니다.

남편과 함께 야구, 축구 등 스포츠를 관람하러 다니는 것이 워낙 관심 없던 분야라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룰도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꽤 좋아하게 되긴 했지만, 여느 사람들만큼 푹 빠져들지는 않고요. 음악회 등의 공연도 남편이 좋아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 정도의 감동은 느끼지만, 자발적으로 ‘또 가야겠다.’라는 마음은 딱히 생기지 않더라고요.

남편은 처음에는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제게 ‘경험치’를 주는 것에 기쁨을 느꼈지만, 무엇에도 열정적이지 못하고 시들한 반응을 보이는 저를 좀 버거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저대로 ‘나의 타고난 성향이 이런데, 굳이 외부 활동을 해야 하나?’라는 반감이 가끔 일기도 한데, 사실 제 성격대로 했다면 직장 외에 외부 활동이 전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무기력증에 관한 책을 읽어 보면 대부분 직장 생활에 관련된 고민이 많던데, 직장 생활은 문제 없이 잘 해내고 있고 그 외에 집안 청소 등 제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입니다. 제 성격이 무기력증의 일환으로서 고쳐야 할 부분인지, 그냥 타고난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내향적인 성격의 사연자님께서 외향적인 성격의 남편분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직업적인 영역에서도 성실하고 원만하게 지내고 계시다고 하니 안심이 됩니다.

특히, 무척이나 외향적인 성격의 남편분과 꽤 내향적인 성격의 사연자님께서 서로의 다른 매력에 이끌려 결혼에 골인하고, 또 각자의 장단점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 현재 사연자님께서 고민하시는 부분은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단지 무척이나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을 가진 남편분과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보다는 혼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여유를 즐기는 사연자님 스스로에게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신 듯합니다. 

더구나 남편분께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고 또 거기서 삶의 즐거움과 활력을 얻는 만큼, 좋은 것을 배우자와 함께 나누고픈 마음에 사연자님께 새로운 활동의 체험이나 동반을 권고하는 일들이 종종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활동들을 체험하거나 시도해 봐도 사연자님께서 남편분 본인만큼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다소 의아한 반응을 보이셨을 테고, 사연자님 스스로도 남편분처럼 푹 빠져들거나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에 괜스레 머쓱하기도 하고,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혼란한 마음에 이렇게 고민 사연을 남겨 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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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연자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사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나 특질은 모두 다릅니다. 흔히 외향성과 내향성은 성격 특징의 여러 지표 가운데 하나로,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당연히 외향적인 성격이 좋다거나 그 반대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외향적이기만 하거나 내향적이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좀 더 두드러지는 성향이 존재하는 것일 뿐이죠. 

어쨌든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 짓는 주요 기준은 개인의 주의 집중과 에너지 방향이 주로 외부 세계로 향하는지, 아니면 자기 내부로 향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정신적인 에너지 또한 외향적인 사람은 외부 세계에, 내향적인 사람은 내면세계에 더 많이 투여하게 되죠. 따라서 사연자님과 남편분은 각자의 성향과 에너지를 투여하고, 또 채우는 방법, 서로의 취향 등을 존중해 주신다면, 큰 갈등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자신이 타고난 성향으로만 너무 치우친 생활을 하다 보면 에너지의 밸런스를 잃거나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의식적으로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너무 외부 활동이나 외부 세계에만 몰두한 채 자아 성찰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 등을 등한시한다면, 바깥세상에 휩쓸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기회가 점점 없어지고, 적당한 휴식이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거나 진정한 자기 욕구를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외향적인 분들은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일에도 어느 정도 시간과 에너지를 배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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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내향적인 분들의 경우, 스스로를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계속해서 새로운 경험이나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자기 내면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생활이 너무 단조로워지거나 점점 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기 어렵게 됩니다. 또 더 넓은 세상과 변화의 흐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어 낯선 세계나 경험에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내면 활동과 외부 활동 간에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사연자님께서 타고난 성향과 그에 따라 선호하거나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남편분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남편분이 관심 있어 하거나 권하는 분야보다 평소 사연자님께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것부터 도전해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지면상으로나마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글을 읽으며 사연자님께 받았던 인상은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연자님의 성격이나 특성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 나가는 데 있어서 굉장한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소홀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쓰며 노력해 오셨을까요. 가슴이 찡해 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생에서 현재의 역할이나 책임감 완수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매사가 긴장과 압박감의 연속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내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거나 스스로의 작은 실수조차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등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인생이 마치 해야 할 숙제나 무거운 의무감처럼 느껴지거나, 일상의 틈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연과 경험을 편안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속적이거나 열광하지 않더라도, 이제부터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일상의 작은 기쁨과 감동, 소소한 재미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누려 보신다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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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시도해 본 것에 대한 후회보다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다고 합니다. 반드시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당장에 이번 주에 보고 싶던 영화나 읽고싶었던 책, 방문해 보고 싶었던 카페나 맛집 등등. 고요히 사연자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진정한 욕구나 바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굳이 버킷리스트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사연자님께서 좋아하고 바라는 것들로 소중한 일상을 채워 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연자님의 일상이 이처럼 소소한 행복과 기쁨들로 채워지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