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엄마를 용서하는 법 좀 알려 주세요

2023-07-26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초등학교 저학때는 부모님 사이가 그럭저럭 좋았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사이가 안 좋아졌어요. 엄마는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부모님 사이는 더욱 안 좋아졌죠. 그 사이에서 저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부모님이 너무 싫었습니다. ‘왜 하필 이 집에 태어나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열세 살 때 엄마한테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전화가 끊긴지 몰랐나 봐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 엄마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그때부터 큰 분노감과 불면증이 생겼어요. 

그래도 공부도 잘했었고,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나마 버텼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반 배정이 망하고, 친구들과 못 어울리면서 폭식증에 외모 강박, 성적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마르고 예뻤던 몸은 통통해지고 성적은 하위권이 됐어요. 거기서 오는 좌절감과 자괴감이 심했고, 제가 너무 혐오스러웠어요. 

지금 스물세 살인데, 지금까지 공부에 대한 강박과 식이장애를 겪다가 일주일 전부터 공부 강박, 식이장애가 매우 좋아졌어요. 스무 살 때 엄마한테 장문의 편지를 보냈어요. “알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 달라.” 엄마가 문자로 내연남과 연락하는 걸 본 이후로는 엄마를 죽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모님께 사랑은 많이 받았어요. 그 덕분에 매우 밝은 성격은 가졌지만, 7년간의 우울증과 폭식증으로 생사를 오갔고, 자살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호소했는데도 엄마는 친구한테 아직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뭐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엄마 핸드폰을 안 보고 있고, 지금껏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 

그런데 엄마한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되면서도 끊임없이 엄마의 부정행위와 그것이 저에게 준 상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엄마를 용서하는 게 마음이 훨씬 더 편할 텐데…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요? 저는 엄마한테 금전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많은 지원을 받았어요. 지금은 부모님 사이도 꽤 좋아졌습니다. 

제 우울증과 강박증의 원인은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가 제일 큰데… 엄마는 제게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 “이렇게 예쁜 나이에 왜 그렇게 우울하게 사냐?”라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이야기인 건 알지만 ‘당신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정말 많지만…. 이제 그만 그때의 일은 잊고, 용서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잊어야 할지, 또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온라인상이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또 용기를 내어 사연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우연히 어머니의 부정행위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채 꽤 오랫동안 사연자님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해 온 듯니다. 사연을 읽는 내내 사연자님께서 느끼셨을 마음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제 마음도 함께 아팠습니다.

우리에게 가정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어린 자녀에게 이상적인 가정이란, 학교생활이나 학업, 교우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나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마음 편히 쉴 수 있고, 따뜻한 정서적 교류가 오가며,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는 실체적인 생활 공동체일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 특히 부모님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할 때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큰 결핍감 없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사연자님의 가정환경은 어떠했나요? 사연자님께서 가정에서 느꼈던 주된 감정과 생활 패턴은 무엇이었나요? 어느 날부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님의 불화로 인해 느꼈을 극심한 불안감, 어머니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질수록 들었던 외로움, 결국 어머니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연자님께서 받으셨을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외도 사실은 사연자님께 어떤 의미였고, 그로 인해 어떤 마음의 아픔을 느끼셨나요? 어쩌면 어머니로부터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미움, 불신감, 도덕성에 대한 실망감, 가정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위협감 등등 사연자님의 행위나 잘못과는 전혀 무관한 사건으로 인해 사연자님께서 감당해야 했을 감정적 고통의 쓰나미를 감히 가늠해 봅니다.

이렇게 과거를 곱씹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애써 덮어 놓았던 마음의 상처만 괜히 더 후벼 파는 것은 아닐까 염려도 되실 테지만, 사연자님께서 겪은 정신적 외상(trauma)의 실체를 살펴보고, 그것이 사연자님의 인생과 마음에 어떠한 자국을 남겼는지 이해해 보는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 번쯤은 꼭 겪어야 할 성장통과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이렇듯 힘든 와중에도 열심히 학업을 이어 가고, 또 좋은 친구들에게서 심리적 지지와 위로를 받으며 나름대로 잘 생활해 오셨던 듯합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시기에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폭식증과 강박 증세까지 찾아와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 오신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기댈 수 있던 교우 관계에까지 지장이 생기면서 그로 인한 좌절감과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어지고, 폭식과 강박에 시달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교우 관계의 어려움 이전에 더 뿌리 깊고 해결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식이장애와 우울증 그리고 강박증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됩니다.

어린 시절 받은 깊은 상처나 결핍은 우리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거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인지 왜곡’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어기제에는 억압이나 부인, 합리화나 퇴행, 분노의 자기에로의 전향 등과 같은 원시적 방어기제도 존재하지만, 중독이라는 방어기제로 빠져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진_ freepik

가족치료사인 브래드쇼(John Bradshaw)는 ‘수치심’의 감정이 중독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수치심은 누군가에게 거부되고, 당혹스럽고, 굴욕감을 느끼는 정서와 관련되며, 여기에는 외로움, 슬픔, 불안, 두려움, 우울, 분노와 같은 감정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강력한 감정은 바로 ‘분노’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분노를 일으키고, 잠재된 분노와 내적 고통은 중독 행위로 표출되는 것이죠.

사연자님께서 폭식증과 강박증에 시달리셨던 것도 어쩌면 심리적 고통을 망각하고자 음식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일종의 중독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렬한 감각 추구의 반복과 강박적인 생각의 반복을 통해 ‘지금-여기’, 내 몸과 마음에서 느껴지는 아픔으로부터 도피하는, 살기 위한 선택지 없던 선택, 말이지요. 

그러나 중독과 강박은 사연자님의 내면 깊은 곳에 마치 옹이처럼 박혀 버린 마음의 상처를 결코 없애지도 또 치유하지도 못한 채 오히려 또 다른 마음의 생채기를 내었겠지요. 그러나 그동안 억눌러 왔던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조금씩 직면하고 표현함으로써 그 상처들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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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서는 “이제 그만 그때의 일은 잊고,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몹시 안타깝게도 이미 우리 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비록 잊고 싶은 그 기억을 말끔하게 지우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와 관점은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과정입니다. 더 이상 그 무거운 기억을 끌어안지 않고, 그 기억에 직면해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면서 흘려보낼 때, 그 트라우마 사건이 내 존재와 나의 삶에 안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만큼 성장하게 되는 거죠. 다만, 오랫동안 사연자님을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인 만큼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과정이 많이 고통스럽고 위협적으로 느껴지거나 시간이 꽤 필요한 작업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의미를 재해석하는 치료적 경험은 신뢰할 만한 전문 상담가나 전문의 등의 도움을 받는다면, 사연자님께서 좀 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며 다루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어머니를 용서하기가 힘들다.’는 사연자님의 솔직한 심정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서란, 의무적으로 때가 되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가능한 것이지요. 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성경에 적힌 ‘용서’의 헬라어 원어는 ‘떠나보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상대로 인해 생긴 마음속 상처와 부정적 감정들에 더 이상 잠식되지 않고, 내 마음의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을 때 상대를 용서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들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충분히 사연자님의 아픔과 마주하고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하셔도 괜찮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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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 번 더 용기를 내셔서 어머니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내게 상처를 준 장본인이라며 상대를 탓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저 과거의 그 사건이 지금껏 사연자님께는 얼마나 큰 상처였으며, 그로 인해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사연자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의미를 두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만약 어머니께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 “왜 그렇게 우울하게 사냐?”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는 것이 곤욕이라면,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요구하셨으면 합니다. 그보다 사연자님께서 어머니께 듣고 싶은 말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사과와 자녀의 인생을 응원하는 지지와 격려의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를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스무 살 때처럼 한 번 더 편지로 써 보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요.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사연자님의 기대나 바람과 달리, 자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또 사죄하지도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는 조금 용기가 없거나 미성숙한 한 인간일 뿐,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테니까요. 

이제 사연자님은 더 이상 작고 힘없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내 영혼에 상처 줄 수 없고, 내 인생을 뒤흔들 수 없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겪으셨던 심리적인 어려움, 우울증과 식이장애, 강박증 등에 대해 치료를 받아 오셨던 건지 궁금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공부 강박과 식이장애가 매우 좋아지셨다고 하나 꽤 오랜 기간 지속되며 사연자님을 힘들게 해 온 문제인 만큼 일시적인 호전일 가능성이 있어 지금껏 치료를 받으신 적이 없다면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전문가의 도움하에 안전하게 트라우마를 다룸으로써 극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마른 몸이 아니어도, 뛰어난 외모가 아니라도, 사연자님께서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타인의 인정이나 수용을 구하기보다, 사연자님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기를… 앞으로는 이제껏 꿈꿔 오고 살고 싶던 사연자님만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