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생각하는 걸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원래 성격이 좀 소심하고 말이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또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말이 술술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저는 이야기를 참 잘 들어 준다는 칭찬을 많이 받기도 하여 큰 문제를 못 느끼며 살아오다가, 최근 연인으로부터 제가 말(표현)을 잘 안 해서 답답하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상대방은 일상 이야기, 느낀 점 등 거의 모든 이야기를 저에게 합니다. 저도 나름 많이 이야기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돌이켜 보면 사귀는 몇 년간 제 상황이 썩 좋지 않아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많이 울었고, 시시콜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걸 이야기해 봤자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표현해 봤자, 상대방은 이해해 주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또 제가 이렇게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모님한테 힘든 걸 내색하거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어. 부모님 말이 다 옳겠지….’ 이런 생각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런 습관이 굳어져서인지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생각은 소용돌이치는데, 정리가 잘 안 되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해도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대답을 머릿속으로만 하게 됩니다. 일차원적인 이야기만 하게 되고, 마음속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까먹은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답답하고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아 슬픕니다. 그냥 생각나는 걸 말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건데 어떤 심리가 저를 누르고 있는 건지 정말 궁금합니다. 예전엔, ‘이런 말 해 봤자 사실 상대방은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야.’라는 심리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상대가 말 좀 하라고 다그치기까지 해도 말을 못 꺼냅니다.
이젠 말할 에너지도 없는 것 같고, 다른 사람 말을 들어 주는 것도 언젠가부터 피곤해져 대충 듣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제 모습을 고칠 수 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글을 읽으면서 사연자님께서는 오랫동안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생각과 마음속의 여러 감정들을 겉으로 표현하기보다 속으로만 꾹꾹 눌러 오셨을 것 같아 많이 답답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다양한 외모와 성격만큼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 방식은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가치관 등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죠.
사연자님께서는 본인의 성격에 대해 “원래 성격이 좀 소심하고 말이 적은 편”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어떤 갈등 상황이 있을 때조차 자기주장이나 자기표현을 하기보다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거나 수용해 주는 편이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통 방식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굳어지다 보니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기회도 그만큼 줄어들고, 마음 한구석에는 ‘어차피 다른 사람들의 의견대로 될 텐데, 뭐.’, ‘내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라는 생각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거나 소통하는 상황에서 자기주장을 펼치기보다 다른 이들의 의견에 잘 협조해 주고 수용해 주는 태도는 갈등을 많이 만들거나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에 비교적 ‘배려 깊은 사람’, 혹은 ‘이타적인 성격’ 등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생활이나 친구 관계에서 큰 어려움은 없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나와 굉장히 가깝고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어야 오해나 서운함이 겹겹이 쌓이지 않고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내 생각과 감정을 잘 인식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물론,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나 수많은 생각, 스치듯 느껴지는 세세한 감정 하나하나까지 타인과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가깝고 소중한 대상과는 적어도 내게 일어난 중요한 일이나 생각, 감정들을 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부부나 연인, 부모-자녀와 같은 가족 등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솔직한 자기 개방 및 자기표현이 이루어져야 하고요.
이를테면, 상대의 어떤 부분이 내게는 조금 힘들고, 어떤 부분은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며, 또 어떤 부분은 미안했고, 그 일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은 이러이러한데, 당신의 생각과 마음은 어떤지 궁금하다 등등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면서 관계가 더욱 발전하고, 감정적 친밀감이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조율하고 맞춰 나가야 할 부분도 그만큼 많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내 마음을 잘 알겠지.’ 혹은 ‘물어볼 필요도 없지. 당신 생각은 내가 다 꿰뚫고 있으니까.’와 같이 상대의 마음을 지레짐작하거나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연자님께서 힘든 일이 있을 때조차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적인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중요한 대상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편안하게 나누고, 인정받고, 공감받았던 경험이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연 속 글에서“부모님께 힘든 걸 내색하거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다.”,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어. 부모님 말이 다 옳겠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이러한 추측을 해 보게 됩니다.
사연자님께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표현하기보다, 엄격하고 높은 기준하에 자기 검열을 거쳐 정제된 표현만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온 부분이 많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마도 현재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정리가 잘 안 되고, 막상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부분도 무의식적으로 지나친 자기 검열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연자님께서 이토록 자기 생각을 검열하고, 감정을 억압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분들이 ‘내가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할 거야.’, ‘말할 때 실수하면 어쩌지?’,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 사이가 나빠지지 않을까?’와 같은 두려움이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앞서다 보면 솔직한 자기표현이 힘들어지므로, 비록 처음에는 조금 어렵더라도 용기를 내셔서 차차 극복해 나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현재 사연자님께서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죠.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리하고 또 표현하는 연습을 해 보신다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점점 더 자기표현 및 소통 능력도 좋아지실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일어나는 핵심적인 생각과 마음을 잘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잡한 수식어나 불필요한 많은 말들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더 혼란스럽게 하기 쉽지요.
예를 들면, 남자 친구 분이 사연자님의 생일에 예쁜 꽃다발과 편지를 준비해 주었어요. 이럴 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시나요? 이때 드는 솔직한 마음을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표현하시면 됩니다. “꽃이 정말 예쁘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대? 너무 고마워. 편지도 감동적이고.”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남자 친구 분이 사연자님의 생일을 깜빡 잊고 지나갔다면 사연자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당신이 내 생일을 그냥 잊고 지나가서 솔직히 많이 실망스럽고 속상했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비단 특별한 이벤트나 상황이 아닐지라도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일들과 관련해서 메모지나 다이어리에 간단하게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보는 습관을 한번 들여 보세요. 분명 사연자님의 생각과 감정을 인식하고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때 너무 높은 기준을 부여하거나 지나치게 자기 검열을 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하고 싶은 말이나 감정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쏟아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본인은 물론 상대방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고 또 소화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인지 숙고해서 점진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전략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열 가지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강도가 10이라면 오늘은 두 가지 주제만, 감정적으로는 3~5의 강도로 표출해 보는 것이지요.
또 상대가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라고 다그칠 때는 “그렇게 다그치면 더 말하기 힘드니까 좀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이 문제에 대해 오늘 밤에 생각을 정리해 볼게. 내일 다시 얘기해.”라고 말하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다시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언급한 주제에 대해서 그냥 잊고 넘어가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고, 꼭 다시 대화의 시간을 가지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연자님의 생각과 감정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점을 늘 명심하시고, 상대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존중한다면 진정한 소통의 문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진실로 강한 사람은 행여 자신의 약점을 잡힐까, 약하게 보일까 자기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힘들면 힘들다,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사연자님께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 진실로 강한 분으로 거듭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