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당신께 전하는 식물 이야기 13 - 플라티클라다와 같은 삶을 살아온 나와 비슷한 당신
유포르비아 종(Euphorbia) 플라티클라다(Platyclada)라는 희귀한 친구가 있다. 잎도 꽃도 없이 그저 조금씩 갈빛의 가지가 자라나는 식물이다. 가끔 물로 씻겨 주면 초록빛이 살짝씩 보이기도 한다.
유포르비아 종을 좋아해서 몇 종류 열심히 키우고 있는데, 주로 초록가지에 푸릇하게 느릿하지만 열심히 자란다. 생기가 사라지면 빛을 잃어 반드시 티가 난다. 하지만 플라티클라다는 워낙 갈빛이어서 죽었는지…, 하는 의심을 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린다.
나는 종종, 플라티클라다를 가만히 바라본다. 매일같이 물을 찾지도 않고, 무늬가 화려해서 눈에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어서 치워야 하는 존재도 아닌 가만한 존재. 숨도 못 쉴 만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내가 플라티클라다와 같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기억을 따라 나서면, 나는 꽤나 생각이 많은 어린아이였다. 당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내가 감당해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매일, 하루 중에서도 여러 번 많은 것들이 변화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매번 ‘굉장히 괜찮은, 안정적인’척 받아들여야 했다.
부모님의 강력한 갈등 상황 속, 극도의 불안함이 나를 휘몰아쳐 잠을 이룰 수 없는 새벽을 지나 한두 시간, 곯아떨어졌다가 깨어나니 아빠가 사라져 있는 상황이 많았다. ‘아마 보름 정도는 보기 힘들겠지….’ 짐작하고 새벽 사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간단히 차려진 아침과 눈물 흘리는 엄마를 살짝 본체만체하며 씩씩하게 인사하고 등교했다.
작은 머리 안에 생각이 가득가득 들어찼다. 답 없는 고민들만이 가득 찬다. 난 비례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그저 플라티클라다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그저 그것인, 갈색 가지가 되어 고민하는 ‘애어른’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또래 친구들과 다른 단어를 사용했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고민하던 것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들의 여리고 푸른 잎이 있는 식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어느 날엔 갑자기 아빠가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식구 잘해 보자.’라고. 그런 날에는 밥상에 특별한 음식들이 올라왔다. 통닭이라든가, 갈빗집에서 외식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날엔 입맛이 유독 돌지 않았다. 밥맛이 없어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엄마 눈치 보며 동생 챙기며, 매일같이 마음고생했는데 갑자기 웃으라고? 잘하자고? 둘 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반항심이랄까, 억울하다고 해야 할까. 이걸 뭐라고 정의해야 탁 맞아떨어질까? 아무튼 간에 나는 누군가 가까운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한 기분과 큰일이 해결된 넋 빠진 기운으로 하루쯤 푹 잠을 청하기도 했다.
불안과 공황은 자주 찾아왔다. 챙겨 왔다고 확신했는데 가방에 책이 없다거나, 숙제를 완전히 잊어서 못한 경우, 친구가 나에게 누군가의 비밀을 말할 때, 야구놀이 하는 동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땅따먹기 놀이하다가 야구 배트로 입을 맞아 피가 줄줄 흘렀을 때, 등등. 나는 그저 ‘기립성 저혈압이 가져온 증상들인가 봐.’ 하고 넘어갔다. 미처 그것에까지 신경 쓸 새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플라티클라다가 되어 버렸고, 어린 입에서 “엄마, 그만 아빠랑 이혼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숱한 밤을 뜬눈으로 불안과 공황장애를 안고 버텨야 했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나는 ‘삶’이란 것의 이유를 찾았고,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출을 하지도 않았고, 자해를 하지도 않았다. 쉽게 어른들이 부르는 ‘불량 학생’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죽은 듯 산 듯 플라티클라다처럼 어느 자리 한 군데를 차지할 뿐이었다. 아무런 불량한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지만, ‘가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물음표였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여간 어디 중간쯤에 있는 것에는 늘 자신이 있었는데, 가족, 엄마, 아빠를 넣은 문장과 어떠한 것들에서는 늘 어정쩡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공황장애는 분명한 발작 증세가 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죽지는 않는다. 그것이 다가오는 것의 조건들을 몇 개쯤 알아채고는 차단한 채 우선 그렇게 반쪽짜리로 살고 있다. 우선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니까. 그런데 우울증을 바닥에 깔아 둔 나는 ‘불안’이 병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불안이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다고 여겼다. 그것이 모두 우울증의 증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울증과 불안증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내 안에서 그것들을 분류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아주 오랜 준비 끝에 그 작은 어린이와 함께 새벽을 불안히 뜬눈으로 새야 하는 날이 돌아온다면,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면, 네가 잠들어도 모르는 새 어딘가로 버려지는 일은 없다고 속삭여 주고 잠이 들 때까지 안아줄 테다.
학교에서 급식비 내지 않았다는 소리가 들려도 그건 어른들 이야기니까, 너는 친구들과 수다만 떨면 된다고 엄지를 치켜세워 줄 것이다. 그래도 아이 등허리가 굽어 있다면, 난 온 힘을 다해 그 아이를 안아 불안해 말라고, 아빠 대신 엄마의 화풀이를 받을 필요도 없다고…, 너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효도를 마쳤다고 용기를 줄 것이다. 플라티클라다 같은 생을 살겠지만, 그것도 아주 근사한 식물이라고 일러 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연습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