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당신께 전하는 식물 이야기 12 - 식물의 무늬가 사라지는 일
버럴막스의 이야기
키우는 식물 중, ‘필로덴드론 버럴막스 바리에가타(Philodendron Burle marx Variegated)’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이 있다. 나는 그저 ‘버럴’ 혹은 ‘스버럴막스’ 라고 부른다. 필로덴드론 종의 식물인데, 길쭉한 모양에 ‘바리에가타(무늬종)’가 더해져 꽤나 흥미로운 변이종의 색을 지니고 있다. 꽤나 잘 자라고, 환경을 크게 타지 않는다.
처음에 집에 온 버럴막스는 꽤나 화려한 모습이었다. 선물받은 화분에 심어, 눈이 한 번쯤 더 가는, 가느다랗지만 예쁜 색을 지닌. 어느 날부터였는지, 잎이 온통 초록색인 일반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난감했지만, 난감한 마음이 무색할 만큼 건강한 잎이었기에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식물계에서 바리에가타(무늬종)란 ‘돌연변이’를 뜻할 정도로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짙은 초록색이나, 아예 흰색(고스트라고 칭한다) 잎만 나오는 경우들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다시 무늬 잎이 나와 주면 꽤나 괜찮은 일이겠지만, 그것을 위해 지금의 안정되고 풍성한 버럴막스를 탓하진 않기로 했다.
식물잎이 무늬 잎에서 초록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불완전한 돌연변이에서 안정적인 초록 잎으로 안착했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그것을 되려 조금은 축하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럴막스는 ‘바리에가타’라는 꼬리표를 떼게 되었고, 인간만 아쉽지 식물 당사자는 정작 안정적으로 풍성한 잎을 내고, 울창해졌다. 이 사실만으로도 버럴막스는 축하받아 마땅하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들이 조금씩 변화한다. 식물도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다. 버럴막스의 무늬가 사라질 때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일생을 그럭저럭, 둥글게, 비슷비슷하게 사는 법은 겪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각자의 이유로 나는 불안을 등에 가득 지고 살아왔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척 견뎌야 했다. 그렇게 마음의 병을 크게 얻었다.
괜찮은 버팀은 없다. 참고 버티면 병이 온다. 내가, 당신이, 당연하다는 듯 참는 그 순간에도 마음의 부채는 쌓이고 누적되어 어떤 이름으로든 자국을 남긴다. 난 내 자신이 ‘바리에가타’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게, 어디 한 군데쯤은 어둑하게 보이는 내 변종적인 생활과 스스로 밝히지 않는 아픔 같은 것들이 내게 무늬가 되어 독특해 보일까 항상 두려웠다. 어떻게든 해맑은 곳에서 상처 자국 없이 잘 자란 초록 잎이고 싶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겉에 드리워 둔 “난 괜찮아.”의 거짓을 걷어내고 내 안에 가득한 어둠을 감지할 줄 알았다. 왜 고민과 발버둥과 슬픔과 그늘은 자국을 남겨 아주 오래 떠나지 않는 걸까?
광택이 나는 초록 잎이 되기 위해 나는 자국들을 지우는 연습을 했다. 식물이라면 환영받았을 특이한 모양이라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계하게 되는 특이한 모양새이니,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병원도 다니고, 명상도 하고, 생각도 거듭하고 기록을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지만, 글을 쓰는 일만큼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확실했다
내 마음을 글로 담는 일은 또 다른 나를 테이블 맞은편에 앉혀 두고, 그녀가 입도 열지 않은 이야기들을 고백하듯 써 내려가는 일이다. 그것을 고이 받아 적고, 인쇄해서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맞은편 흐릿한 그녀에게 확인시켜 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우는 그녀를 달래는 일도 내 몫이다.
불편한 이야기를 나눈 날이면 공기를 전환시키는 것 또한 내 몫이 된다. 불안한 나는 나를 달래서 꽤나 흥미로운 영상 콘텐츠를 보게 하거나, 짧은 명상을 하게 한다. ‘나비 포옹법’도 잊지 않는다. 공황 발작이 일어나면, 불안감이 올라가면 해 보라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오랜 방법인데, 두 팔을 가슴 위에서 교차시킨 상태에서 양측 팔뚝(어깨쯤)에 양 손을 두고 나비가 날갯짓하듯이 좌우를 번갈아 가며 살살 두드리는 방법이다. 이때, 내가 아주 안전하고 안정적이었던, 포근하고 행복했던 기억을 함께 떠올리면 차분히 가라앉히기에 아주 좋다. 나는 나비 포옹법을 슬쩍슬쩍 자주 하는 편이다. 효과도 좋고, 좋았던 기억이 나도 모르게 업데이트 되어 있는 것을 직면하면 ‘우아, 이만큼이나 더 행복해졌었구나.’하고 기쁨을 얻기도 한다.
나는 바리에가타인 것을 대부분 숨기지만, 가끔씩 뿌듯할 때가 있다. 그때는 바로, 같은 바리에가타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숨 막히게 참고 있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얇디얇게 겨우 숨기고 내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본 순간, 나는 동족을 바라보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늠한다. 가늠하되 넘겨짚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수만 가지 이유로 아플 수 있기에, 얇고 작은 세계에 살아 본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짐작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식물에게 해 대신 설치해 둔 식물등이 너무 가깝게 설치하면 오히려 잎을 태울 수도 있는 것처럼, 모두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려 다가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한다. 나는 나의 오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누구라도 품어 주고 싶은,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만. 특히 불안에 휩싸인 사람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하려고만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말이다.
누적되어 온 나의 무늬는 나만의 오롯한 무늬일 것이다. 이것이 매력이 될 수도, 어떤 이들에게는 훈장처럼 보이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또 어쩌면 내 작은 바람대로 언젠가는 초록 잎이 하나둘 피어나 건강한 초록 잎으로 변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당장 불현듯 튀어 오르는 불안을 잠재우며 하루씩의 나를 쌓아 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