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2부
정신의학신문 |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 부질없는 것 같아요.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모르겠어요."
많은 환자들이 진료실에서 삶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한다. 자살하면 안 된다는 만류 앞에서 그들은 오히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그렇지만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반박함으로써 그들을 설득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삶의 의미를 누가 감히 정의 내릴 수 있겠는가. 모두에게 자신 있게 '내 삶의 의미는 ~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의 중점 역시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무의미에 집착하게 되었는가를 함께 짚어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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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의미함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 보면' 전부 무의미하다.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은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만 년, 10억 년이 흐른 뒤에는 무슨 의미가 남겠는가. 무한한 평행우주 속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한 지금, 이 모습이 대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어떻게 보면' 삶은 정말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의미함에 매몰되었다는 것은, 원래는 가지고 있던 어떤 특별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다. 특별한 삶의 의미는 원래부터 분명하지 않다. 그보다는 무의미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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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의 삶 역시 무의미함과 쓸모 없음으로 가득 차 있다. 세탁소 비용으로 구매한 노래방 기계의 영수증도, 남편이 내미는 이혼서류도, 이해할 수 없는 딸의 연애도, 그저 똑같이 빙글빙글 돌아가기만 하는 세탁기처럼 모두 무의미한 권태로 가득하다.
우여곡절을 통해 모든 평행우주의(Everywhere) 모든 것들을(Everything) 모두 동시에(All at once) 경험하게 되면서도 여전히 이 우주 속 그녀의 모든 일상은 똑같다. 똑같은 쳇바퀴처럼 세탁소의 탈수기는 똑같이 돌아가고 있다. 결국 무의미하다.
그러면 마지막에 이르러 평화를 찾은 에블린이, 조이가 깨달은 무엇일까. 무한한 평행우주에서 무한번 재회하며 확인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내 곁에 '너'가 있다는 감각이다. 이 무의미한 삶을 함께 살아갈 대상이 내 곁에 있다는 감각이다.
정신과 의사 하인즈 코헛(H. Cohut)은 자기애적 환자들이 타인을 도구화하는 것은 내면의 공허감을 메우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코헛은 자기심리학의 창시자이자 공감과 사랑의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기애적 환자들과의 면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의사가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하는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자기애적인 환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의사 역시도 자신의 무언가를 채워 줄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해 주는 가운을 입은 로봇, 혹은 이상화된 판타지 속 영웅으로 여긴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의사의 실수(예를 들어, 공감에 실패하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등등)가 발생하는 순간, 마치 영화 속 멀티버스 점프와 같은 돌발적인 일이 생기는 그 순간, 코헛은 그 순간 치료의 불빛이 번뜩인다고 역설했다.
그 순간은 환자가 무의식중에 의사도 '사람'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것은 마치 가운을 입은 돌멩이가 갑자기 눈, 코, 입을 가진 사람이 되어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환자들의 방추상회에 불이 켜지는 순간이다. 진료실 안에서 처음으로 사람과 사람이 조우하게 되는 순간이다.
실수를 하는 불완전한 '사람' 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적인 관계를 이어 갈 수 있게 될 때 공허감을 극복할 실마리가 드러난다. '불완전한 사람은 무의미하다.'라는 허무감에서 한 발 내려와, 앞의 상대방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때, 무의미한 공허감을 함께 나누며 견뎌 나갈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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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은 거창하고 특별한 삶의 의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저갱 같은 공허감를 메우는 것 역시 완벽하고 이상적인 삶의 트로피가 아니다. 삶의 공허와 무의미함은 불가피하다.
비단 자기애적인 사람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은 일상 속에서 무의미한 권태에 조금씩 지쳐 간다.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조금씩 공허하다. 일상을 곱씹을수록 무의미하다.
하지만 괜찮다. 무의미하고 공허한 일상일지라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말이다.
무의미한 노래방 기계를 부여잡고 뜻없이 서로 장난을 치는 에블린과 조이의 모습에는 '너'와 '나'가 있다. 영어를 못하는 아버지와 중국어를 못하는 딸 사이의 무의미한 조우에서는 부녀간의 눈맞춤이, 모녀간의 눈맞춤이 이어 주는 '너'와 '나'가 있다. 평행우주든 무한대의 공허든, 허무의 베이글이든 돌멩이든 아무래도 좋다. 조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에블린 '나'도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라는 욕심이 아니다. 너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으니, 관계에서 의미을 얻어 내겠다 하는 목적의식이 아니다. 관계를 치유적으로 잘 활용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우리 관계란 어떠어떠 해야만 해, 라는 의무감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것만을 느껴 보자는 것이다. 나와 함께 있다는 감각, 방추상회가 반짝이는 묘하지만 따뜻한 그 감각, 나와 함께 눈물겹게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그 무엇도 좋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게 온전히 느껴 보자는 것이다.
슬프지만 공허는 거기 그대로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공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 않는다. 허무함에서 눈을 돌려본다면, 바라볼 '너'를 찾을 수 있다. 그 대상이 아무리 무의미할지라도, 하물며 플라스틱 가짜에 불과할지라도, 그 안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다면, 괜찮다. 적어도 함께 무의미한 일상들을 헤엄쳐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는가. 당신 곁 그 사람의 눈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총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