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항상 거기 있을 것이라는 믿음, 대상 항상성
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절 저공이라는 사람과 원숭이들의 일화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저공이 원숭이를 키우다가 식량이 부족해지자 먹이를 줄이고자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펄쩍 뛰며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좋으냐?”라고 물었고, 원숭이들은 신이 나서 좋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같은 대상을 앞뒤만 바꿔서 상대방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일컬어 ‘조삼모사’라고 합니다. 어차피 하루에 7개를 먹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쉽게 속는 원숭이들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얕은 꾀로 원숭이들을 속이는 저공이 얄밉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삼모사가 비단 사자성어로만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조삼모사 같은 경우를 마주할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분명 말로는 나를 위해 주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고, 하루는 맑았다가 다음 날이 되면 잔뜩 흐려지는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일관된 모습이 아닌 수시로 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언젠가는 내 편인 것 같았는데, 또 어떨 때는 차갑게 돌아서는 것 같은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했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되는 데 있어 대상 항상성(Object Constancy)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유아는 성장하는 동안 주양육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과 그 대상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발달 과정을 거치며 자신과 주양육자가 분리된 존재임을 인식하고, 주양육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보이지 않더라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언젠가 돌아올 것이며,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대상 항상성이 잘 형성되면 성인기에 만나는 사람들과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대상 항상성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경우에는 분리불안이나 불안정 애착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물론 주양육자에 대한 대상 항상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이후에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좋은 친구나 스승, 동료, 연인 등과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서 건강한 애착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 있고 안정감, 신뢰감을 느낄 수 있는 건강한 관계를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예측 불가능하며 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긴장감과 불안함의 연속이라면 장기적으로 그 관계는 도움이 된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맞춰야 하거나 에너지 소진이 더 크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반대로 화려한 말솜씨를 갖고 있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에 더욱 애정을 쏟고 노력을 기울여야겠지요. 그 사람은 친구일 수도, 동료일 수도, 배우자 또는 연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설사 어린 시절 대상 항상성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지켜 주며, 늘 그곳에 있으리라는 신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이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곳이 아닌, 안전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해주는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납니다. 때로는 생각지 못한 역경과 고난을 마주하며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 보면 사람에 대한 기대도, 세상에 대한 희망도 놓게 됩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통해 대상 항상성을 경험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혹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선의가 쌓일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하고 따뜻한 곳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른 한 편으로는 관계에서의 ‘항상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이나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그것이 때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실망스러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항상성(homeostasis)’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 사람은 이전에도 그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사람이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도 100% 내가 기대하거나 예상한 모습에 부합할 수만은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때로는 의외의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서로의 다른 점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차이가 너무 중요하고 결정적인 부분이어서 상대방과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또한 그 사람의 일부이며, 그것이 그의 전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관계에서 조금 더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 외에도 그 사람이 가진 장점, 함께한 시간과 추억을 떠올리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술을 획득해 가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족한 나의 모습까지 사랑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끼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도 좋습니다. 일관성, 안정감 있는 관계를 통해 ‘당신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받을 때, 삶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