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지우개, 알츠하이머와 뇌 변화
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아마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2004년 개봉한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남자주인공 철수(정우성분)가 여자주인공 수진(손예진분)에게 한 유명한 대사입니다. 안 마시면 다시는 볼 일 없는 거라는 철수의 말에 수진은 주저 없이 그가 따라준 소주잔을 들이키고, 둘은 그렇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생활도 잠시, 수진이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철수는 그녀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 제목은 알츠하이머가 발병하며 나타나는 기억상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수진은 조기발병 알츠하이머(Early-Onset Alzheimer’s Disease: EOAD)를 앓았습니다.
알츠하이머는 1906년 독일인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박사가 처음 보고한 병으로,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 가는 퇴행성 질환입니다. 알츠하이머는 65세 이후에 발병하는 후기발병 알츠하이머가 대부분이지만, 전체 알츠하이머 중 약 5~10% 정도가 65세 이전에 발병하는 조기발병 알츠하이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치매 환자 중 과반수 이상이 알츠하이머에 의한 치매 증상을 보이며,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의 경우 가족력과 같은 유전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츠하이머가 나타나는 원인은 유전적, 생물학적 기전과 환경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으며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상 단백질인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과 타우단백질이 뇌 속에 축적되고, 괴사된 신경세포들이 응집되면서 기억상실을 비롯한 증상들을 발현시키는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뇌는 일반인에 비해 대뇌피질이 눈에 띄게 수축되어 쪼글쪼글한 모양을 띠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역시 위축되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억상실과 시간, 공간, 상황에 대한 지남력 상실과 같은 증상은 이런 해마 기능의 약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뇌실은 현저하게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었는지에 따라 증상 역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런 점으로 인하여 환자의 증상을 통해 역으로 손상된 뇌 영역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측두엽에 위치한 해마를 중심으로 기억손상이 나타나다가 중기가 되면 언어를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되면서 필요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하고, 시공간 기능을 담당하는 두정엽 기능이 저하되면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측 측두엽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좌측 측두엽이 손상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말기에는 전두엽이 손상되면서 의사소통 문제와 판단 장애를 경험하면서 감정 조절의 어려움, 화를 내거나 집착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이렇게 뇌의 다양한 영역이 알츠하이머와 관련되어 있기에 뇌영상 평가를 통해 알츠하이머 발병 초기부터 위축된 양상을 보이는 측두엽과 두정엽에 대한 검사와 함께 대뇌피질, 백질 등에서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진단 정확도를 높이고 원인 및 치료법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미국 코넬대학교의 네이선 스프렝 박사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인지뇌과학 연구실의 테일러 슈미츠 박사가 알츠하이머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해마를 중심으로 한 측두엽에서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두엽 아래쪽에 자리한 기저전뇌(basal forebrain)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한 바 있습니다.
202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 연구팀에서 동물 데이터가 아닌 인간 데이터를 활용하여 알츠하이머 진행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 응집체의 응집이 매 증식 때마다 1개에서 2개, 2개에서 4개와 같이 배가 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인간의 뇌가 응집체 증식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에 비해 증식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 응집체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 알츠하이머 진행 속도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더 많은 후속 연구와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뒷받침될 필요가 있지만,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다양한 연구들은 알츠하이머의 원인과 진행 양상, 효과적인 치료법 개발을 위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는 질병을 앓는 환자 본인에게도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지만, 돌봄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부담을 줍니다. 2020년 기준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83만 8천 명, 유병률은 10.3%로 65세 이상 노인인구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통계지표는 알츠하이머와 치매가 그만큼 흔한 질환이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해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이들 역시 매우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알츠하이머에 대한 뇌 분야 연구를 통해 원인과 증상, 치료법에서의 발전을 모색함과 함께 알츠하이머로 인한 변화가 삶의 재난이 되지 않도록 사회적 관심과 충분한 복지 및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츠하이머가 환자 및 가족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지 않고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반드시 다뤄져야 할 사회적 이슈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알츠하이머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내 주변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공감적 인식과 태도를 보이는 것부터 첫걸음을 떼보는 것은 어떨까요? 알츠하이머 발병 이후에도 삶의 질을 유지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