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배우자의 불륜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지친 표정, 혹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선 분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곤 합니다.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 상처, 분노 등. 그 일을 잊을 수 없고, 배우자를 용서할 수 없다며 괴로워하시죠. 이로 인해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 배우자를 용서한 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은 ‘용서의 미덕’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성경에 나오기도 하고, 교과서 속 철학자의 고찰에도 등장하며, 인생 선배의 조언을 통해 접하기도 합니다. 이때 용서의 정의는 각각 다릅니다. 조언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용서의 가치를 설명하지요. 그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용서라는 것 자체가 무언가 규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혹은 무척 숭고하고, 고차원적인 그 무언가 같기도 하고요. 성인군자가 하는 올바르고, 도덕적인 행위. 그렇기에 우리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우리는 이렇게 용서라는 행위에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죠.
물론 용서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맞습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용서는 스트레스 수준을 낮추고 정서적 웰빙을 높이며 혈압을 낮추기까지 합니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고 반추하다 보면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어떤 문제를 마음속에서 되새기며 분노, 우울, 불안 등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할 경우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는 등 마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용서의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용서를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라고 정의합니다. 잘못을 힐난하지 않고, 응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덮어 두는 게 용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과연 용서의 전부일까요? 가해자를 탓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정말 용서라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걸까요?
성경에 적힌 ‘용서’의 헬라어 원어는 ‘떠나보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저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가 이것에 가깝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비난하지 않고, 벌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를 떠나보내는 것. 마음에 박힌 그 응어리를 흘려 버리고, 이제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 그래서 그 뚫린 가슴에 연민이나 사랑 등의 감정으로 채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지금 마음이 너무 아파서 상처가 떠난 그 자리를 도저히 다른 감정으로 채울 수가 없다면요. 어린 시절 날 학대한 부모를, 성폭력의 가해자를, 날 왕따했던 친구를, 부정행위를 한 배우자를 그리 쉽게 용서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답을 선뜻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양면적이기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때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자신의 동기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섣불리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자율성적인 측면에서 나의 마음은 ‘기꺼이’, 혹은 ‘선뜻’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일치해야 자신을 “난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하는 용서는 자기기만이나 위선처럼 다가올 수 있는 것이죠. 내가 그저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위선적인 행위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지속되면 자신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해 한 것만 같고, 이에 대한 만족감을 못 느끼기 때문에 용서의 과정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스탠퍼드 용서 프로젝트’의 공동설립자이자 소피아대학교 임상 심리학과 교수인 프레드 러스킨 박사는 상처 입었을 때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는 건 자연스럽고 건강한 반응이라고 말합니다. 이 상처를 극복하고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고 강조하죠. 용서는 당사자의 선택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입니다. 러스킨은 진정한 용서란, “분노와 슬픔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다음 이제 삶과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놓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의 상처를, 아픈 기억을, 가해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그리고 미움을 떠나보내는 승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아직은 용서하지 않아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관대하지 않은 사람’ ‘속이 좁은 사람’ ‘미성숙한 사람’ 등의 부정적인 말로 비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증오나 미움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자기 파괴적인 감정만 아니라면,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위해 충분히 아파하는 일종의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섣부른 용서는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남기기 마련이고, 이는 내가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자기 비난적인 생각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과 같습니다. 아직 충분히 미워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마음의 평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놓아 줄 수 있을 때 놓아 주세요. 이미 다친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말로 또 다른 상처를 주지 마세요. 대신 이 미움이 끝이 아닌,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과정의 한 지점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그를 용서하는 ‘중’입니다. 떠나보내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괜찮습니다. 아직은 용서하지 못해도.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전문의